챕터 8. 의미 : 남겨지는 것들

by 박정효

온유는 오랜만에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창밖이 아직 밝아지기 전, 방 안에는 새벽 특유의 고요가 가득 차 있었다. 번역 작업이 없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비워 둔 날이었다. 예전 같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으니까.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온유는 잠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잡념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처럼 그것들이 줄줄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은 떠올랐다가, 잠시 머물고, 다시 가라앉았다. 물결처럼.


책상 위에는 며칠 전 밤새 정리했던 글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간 기록이었다. 불안, 분노, 피로, 그리고 이상하게도 감사까지 섞여 있는 문장들. 처음엔 혼자만 보려고 쓴 글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는 그 글을 AI에 올려놓고 질문을 던졌었다.


“이 상태의 나는 뭘 통제할 수 있고, 뭘 내려놔야 할까요?”


그날 이후 온유는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했다.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의 형태는 통제할 수 없지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번역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감각과 언어는 이미 자신의 일부라는 것.


온유는 노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불안을 정리하는 글이 아니라, 조금 다른 질문에 답해보고 싶었다. 만약 시간이 흘러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면,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을까. 일을 잘하던 사람보다는, 말이 필요할 때 조용히 옆에 있어 주던 사람. 정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같이 붙잡아 주던 사람.


그는 문장을 하나 적었다.

“나는 사라지는 직업보다, 남아 있는 태도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글을 쓰는 동안, 온유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미래를 계획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미래가 아주 구체적인 장면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현실적이면 충분했다.



같은 시각, 이담은 강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러 나온 건 아니었다. 전날 꽤 오래 뛰었고, 오늘은 굳이 기록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어폰을 빼고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일요일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예전에는 늘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요즘은 그 무게가 조금 달라졌다. 월요일이 싫은 이유를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일이 아니라 관계였다. 정확히는, 서진 팀장과의 미묘한 긴장감.


하지만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이담은 그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됐다. 뛰는 동안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런데도 결국 한 발을 더 내디뎠던 기억.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상대를 바꾸는 건 어렵지만, 대응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는 것.


이담은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며 메모 앱을 열었다. ‘지금 회사에서 내가 바꾸고 싶은 건 뭘까?’ 회의 방식, 말의 톤, 주말을 잠식하는 일정들. 생각해보니 불만은 많았지만, 이상적인 모습은 한 번도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문장을 조금 고쳐 썼다.

‘내가 바꾸고 싶은 건 회사가 아니라, 관계의 온도다.’


만약 마법의 지팡이가 있다면, 팀장이 갑자기 변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보다도, 솔직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자신이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말 한마디를 덜 날카롭게 건네는 것, 회식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정리하자고 말하는 것, 달리기처럼 하루하루 쌓아가는 태도.


이담은 휴대폰을 닫고 다시 일어섰다. 뛰지 않았지만, 몸은 충분히 움직였고 마음은 오히려 더 가벼워졌다.



그날 저녁, 온유와 이담은 함께 부엌에 섰다. 화려한 요리는 아니었다. 냉장고에 있던 채소를 씻고, 단백질을 굽고, 접시에 담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눴고, 말이 많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다가, 이담이 말했다.

“예전엔 좋은 게 뭔지 알면서도 안 했던 것 같아. 귀찮아서.” 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완벽하진 않은데, 덜 속이는 건 된 것 같아.”


그들은 최근 각자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온유는 글을 쓰며 떠올린 미래의 장면들을, 이담은 회사에서 바꾸고 싶은 작은 풍경들을.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어디에 속하고 싶은지’로 흘러갔다.


온유는 자신이 가진 언어 감각을, 이담은 꾸준히 해온 실행력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직접 돕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강점을 활용해 기여할 수 있는 자리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라, 연결되는 방식으로.


식사가 끝날 무렵, 온유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생활도, 누군가에겐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담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최소한, 우리한테는 이미 그렇지.”


그 말에 온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라는 걸, 둘 다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두 사람의 하루는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운동, 기록, 관계, 선택. 모두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다. 삶의 조각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느리게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아주 단순했다. 내일도 다시 살아볼 수 있는 오늘을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길 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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