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박정효

마지막 메모는, 봄비가 멎은 밤에 떼어졌다.


온유는 냉장고 문을 닫기 전에 잠깐 멈췄다. 우유색 문 한가운데, 자석이 있던 자리만 옅게 남아 있었다. 종이는 이미 지갑 안에 있었다. 여섯 줄은 더 이상 벽에 붙어 있지 않았지만, 사라진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는 적지 않아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까웠다.


그녀는 컵을 씻고 불을 낮췄다. 창문을 손바닥만큼 열자, 바깥 공기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습관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왔다. 예전엔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면, 오늘은 끝났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 온유는 침대에 앉아 잠깐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촉감이 발바닥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같은 시간, 이담은 강변을 걷고 있었다. 뛰지 않는 날이었다. 신발끈을 느슨하게 풀고, 물 위에 비친 가로등의 흔들림을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기록을 확인했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발이 멈추면 멈췄고, 다시 나가고 싶어지면 조금 더 걸었다.


회사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사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진 팀장은 바빴고, 지아는 여전히 분명했다. 달라진 건, 이담이 서두르지 않는 지점이었다. 말을 꺼내기 전의 한 박자, 회의를 끝내는 마지막 문장,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는 순서. 그는 달력에 점을 찍지 않았다. 대신 내일 신을 양말을 미리 꺼내 두었다.


며칠 뒤 저녁, 둘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접시는 크지 않았고, 색은 충분했다. 남긴 것이 조금 있었지만, 굳이 더 먹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두니 저녁 바람이 천천히 지나갔다.


“요즘은 어때?”

이담이 물었다.


온유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부는 아니고… 그래도 괜찮아.”


그 말이면 충분했다. 더 묻지 않아도, 서로의 하루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둘은 접시를 나란히 옮겨 놓고, 물을 한 컵씩 마셨다. 대화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끝났다.

합창 연습이 끝난 날, 해원 선생은 조명을 끄며 말했다.


“다음엔, 노래 말고 다른 걸로도 한 번 모여봅시다.”


누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숨을 나누는 데, 꼭 악보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계단을 내려오며 온유는 발걸음을 조금 늦췄고, 이담은 그 속도에 맞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서로의 리듬이 겹치는 속도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낮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온유는 지갑 속 종이를 만졌다. 접힌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이담은 강변을 한 번 더 돌아볼까 하다 그대로 직진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닫아도 괜찮았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특별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하루가 제자리에 놓였다는 느낌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다음 날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두번째 조용한 궤도, 해원 선생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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