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포기하는 것들
내가 꿈꾸던 가정의 모습에는 엄마가 항상 집에 있었다.
우리 엄마가 전업 주부였고, 유치원이든 학교든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대부분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이가 언제든 와서 안길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장래희망을 구체화할 무렵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 커리어우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모두가 말하는 멋진 커리어우먼.
몸에 핏 되는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화장을 꼼꼼하게 한 전문적이고 도시적인 느낌의 "여성"
남성들과 대등하게 어깨를 견주고 일에서 밀리지 않는 여성.
지금껏 여자아이로 살던 나에게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름은 아주 매력적인 명찰 같았다.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던 나의 욕망과 일하는 여성으로 남고 싶던 나의 욕망은 역시나 충돌했다.
결혼할 무렵 맞벌이에 대한 의견을 남편과 이야기했다. 남편은 맞벌이를 강요하진 않았지만 외벌이라면 소비가 줄어들고 포기할 것들이 생길 거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나에게 남편의 태도는 약간 서운했다. 말만이라도 "걱정 마라, 우린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남편은 왠지 맞벌이를 희망하고 있으나 나에게 어쩔 수 없이 둘러대는 것만 같았다.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있었다.
회사 사정이 악화되면서 마케팅팀을 해체하고 여기저기로 인원을 갈라놨다. 나는 당시 내 업무에 대한 프라이드도 높았고, 영업팀과 업무적으로 심한 마찰을 겪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심하게 으르렁거리던 영업팀에 배정되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회사야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케팅팀에 속했던 대부분이 그만두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임신을 알았다. 너무나 기뻤다. 나와 남편을 닮은 아이를 상상하며 임신의 기쁨을 양가에 알리고 매일매일 아기에게 나쁜 영향이 가지 않도록 살금살금 살았다. 임신도 했으니 취업을 좀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아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설 연휴 직전에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아이의 심장이 이미 멈췄다고 했다. 콩닥거리는 심장소리를 기대하고 간 병원 입구에서 나는 오열했다. 비록 초기임신이었지만 아이의 몸을 나와 분리하는 소파시술을 받았다.
내 인생 최대 암흑기였던 취업준비 2년의 시간보다 더 큰 상실감을 앓았다. 며칠을 남편과 끌어안고 울었다. 다시 내 몸을 정리하고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취업은 또 저만큼 멀어져 갔다. 일단 건강이 먼저라고 생각하여 끊었던 수영도 다시 다니고, 남편과 힐링이라는 명목하에 많이 놀러 다녔다. 그리고 여름 다시 아기가 찾아왔다. 기쁘고도 무서웠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머릿속에서 취업은 점점 밀려났다. 아이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퇴사했던 다른 마케팅팀 직원들의 소식이 들렸다. 대부분 새롭게 찾은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부러웠지만 나는 누구보다 건강한 아기의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아주 건강했다.
다만 임신 후기쯤 터진 코로나로 인해 나의 아기는 코로나베이비가 되었다. 임신 7개월쯤 코로나가 터져서 아예 집콕 생활을 했고, 아이도 태어나자마자 안전을 이유로 격리됐다. 그리고 우리는 바이러스를 피해 집밖으로의 생활을 거의 멈춘 채 살았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무렵 예전에 함께 지내던 동료들에게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이집도 못 간 아이를 두고 일을 하러 나갈 순 없었다. 또 그때는 코로나 공포가 심각할 때였기에, 내가 일을 다니다가 아이에게 코로나를 옮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커서 어린이집을 다니고 적응을 마칠 때쯤 되자, 우리의 이사가 얼마 안 남았다. 새 아파트로 이사가 새로운 어린이집에 다시 적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또 나의 일을 미루었다.
내 아이는 어린이집에 9시에 가면 4시에 하원을 한다. 물론 맞벌이 부부의 경우 8시에 맡기고 6시 넘어서 하원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나의 아이가 시계만 보면서 자기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계를 볼 줄은 몰라도, 누가 언제 하원하는지 순서를 알고 있기에 자기가 지금 하원을 빨리 하는지 늦게 하는지 다 꿰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이는 내 인생의 1순위가 되었고, 나에게 자유시간은 하루에 7시간뿐이었다. 그 7시간 동안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아이가 먹을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내 점심 먹을 시간을 제외하면 온전한 자유시간이 생각보다 더 적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점심시간에 바쁜 식당이나 카페 등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프리랜서처럼 일할 수 있는 전문기술도 없었다. 그저 아주 평범하게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는 마케팅 업무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고 거기에 야근을 할 수도 있는 그런 근무환경에 출퇴근시간 왕복 1시간씩을 더하면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2시간 남짓이다. 그게 아주 정상적이고도 보편화된 내가 구할 수 있는 근무형태였다.
예전에 미혼이었을 때, 같이 일하던 기혼 과장님은 야근 때마다 통화를 했다. 사실상 그 회사는 거의 매일 야근을 했기 때문에 저녁마다 아이와의 통화를 들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우리는 언제 만나요 엄마?" 하고 물었다. "엄마가 미안해. 할머니랑 자고 있으면 갈게. 우리 토요일에는 같이 놀자."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도 엄마도 불쌍했다. 엄마라는 존재지만 아이의 옆에는 할머니만 있었다. 나 역시 일을 하게 된다면 친정 엄마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엄마를 찾는 아이도 불쌍하고, 다 늙어 손주 육아를 하는 친정 엄마도 불쌍하다. 이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경력단절녀가 되었다.
출산율이 낮다고 사회적으로 아무리 떠들어대도,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내가 어느 정도 자리에 올라가고 경제적으로 이룩한 뒤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와 씨름하며 매일매일 나의 밑바닥을 반복해서 보는 일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인지 대부분의 엄마들은 알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 아이의 육아시간을 방해받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해나갈 수 있는 성취감 있는 직업인이 되고 싶다. 그 꿈은 앞으로도 계속 꿀 것이다. 하지만 나의 우선순위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형태는 구체화되기 어렵다.
아이가 1번인지, 돈을 버는 게 1번인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게 1번인지.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 세상이 올까?
출산율이 걱정된다면, "나는 아이가 1번이니까 이건 포기해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포기하는 게 많아지면 당연히 출산을 기피하게 될 테니까.
단순한 지원금이나 아이를 대신 봐주는 것보다 가정이 가정답게 유지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있어야 이런 고민들이 줄어들게 되겠지. 그 대책이 나오기 전에 우리 아이가 이미 다 커버리고 나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언젠가 조금 더 건강한 대책이 나오기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