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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dermovie Mar 07. 2024

창작자를 떠나 비로소 비상하는 창작물 -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기존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색깔로 재창조해 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테이블에 올라온 이번 재료는 메리 셸리의 고딕 호러 <프랑켄슈타인>이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은 창작자와 창작물에 관한 영화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창작자를 떠나 비로소 완성되는 창작물에 관한 영화다. 수많은 향유자를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 예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영화 예술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고 있다.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는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창조된, 아니 창작된 인물이다. 그러나 이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과는 결이 다르다.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이름 모를 시체를 구해 와 괴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가여운 것들> 속 벨라에게는 명확한 사연이 있다. 빅토리아 블레싱턴의 이름으로 살았던 과거. 빅토리아라는 ‘사연’을 가진 여성은 아버지로부터 여러 실험을 당했던 벡스터의 ‘경험’과 합쳐져 벨라로 재탄생한다. 영화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사연’, 창작자의 ‘경험’이 합쳐진 재창조의 산물이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창작자의 것이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크린에 걸리는 순간, 영화는 창작자의 품을 떠난다. 그리고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로 간다. 이는 창작자가 막을 수 없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은 벨라와 함께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때 그는 창작자인 굿윈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물인 벨라에게 요청한다. 그렇게 벨라는 창작자인 굿윈을 떠난다.


이후 여행길에서 벨라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리스본과 배를 거치며 던컨을 떠나보내는 벨라는 매음굴에서 일을 시작한다. 란티모스 특유의 다소 과격하고 지독한 유머. 이 영화에서 매음굴은 곧 극장이다. 벨라라는 영화가 본격적으로 극장에 걸리는 순간이다.



주체적인 벨라(영화)는 손님이 자신을 고르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자신이 손님을 고르고 싶어 한다. 이때 매음굴의 사장인 스위니(캐서린 헌터)의 대사는 사실상 이 영화가 말하는 영화 예술이 완성되는 과정의 본질이다. 경험을 통해 단단해지는 ‘인간’은 곧 경험을 통해 단단해지는 ‘영화’를 의미한다. 이 말을 들은 벨라는 영화 예술이 향유되는 원리를 깨닫는다. 영화는 관객을 선택할 수 없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그럼 이때 영화의 역할은 무엇일까. <가여운 것들>이 내놓은 해답은 ‘질문’이다.


벨라는 자신을 선택한 남성과 관계를 맺기 전 그들에게 퀴즈, 곧 질문을 한다. 그리고 남성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 준다. 영화는 하나의 정답이 없다. 관객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자신이 보고 있는 영화에 투영한다. 다층적인 영화, 곧 훌륭한 영화는 그 모든 경험들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여러 개의 정답을 제시한다. 한 영화를 두고 이를 즐긴 객석의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영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예술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벨라라는 영화는 그렇게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더욱 단단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양한 체위의 섹스 신들. 란티모스의 지독한 유머 감각은 영화와 관객의 교감을 섹스로 은유한다. 다양한 체위는 곧 다양한 관점을 의미할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벨라는 고향 런던으로 돌아와 맥(라미 유세프)과 결혼하려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절 남편인 블레싱턴 장군(크리스토퍼 애봇)의 등장으로 끝내 결혼식은 마무리되지 못한다. 결국 영화란 온전히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갓윈의 집에 벨라, 맥스뿐 아닌,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창작자 갓윈의 죽음에도 여전히 생생한, 아니 오히려 여러 향유자들의 경험을 통해 더욱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벨라. 이는 곧 영화 예술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영화 내내 과격했던 <가여운 것들>은 종국에 따뜻한 햇살 아래 행복한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름답게 끝이 난다. 영화를 향한 란티모스의 애정이 담긴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맥스가 벨라의 비밀을 안 후 갓윈과 맥스가 나누는 대사는 흥미롭다. 그 장면은 갓윈의 대사로 끝난다.


“자네는 벨라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나”


란티모스는 개성 넘치는 벨라의 여행담을 통해 마지막에 다다라 이 질문에 대답한다. 자신은, 우리는 영화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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