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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dermovie Feb 10. 2022

서스펜스를 발라내고 사랑을 남긴 실험적인 후더닛

나일 강의 죽음 (Death on the Nile, 2022)


나일 강의 죽음 (Death on the Nile, 2022)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4년, <나일 강의 죽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정보를 알고 간 관객들에게는 원작에 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뜬금없게 느껴질 것이다. 원작 밖의 이야기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듯 흑백의 화면으로 진행되는 오프닝 시퀀스. 이 뜬금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핵심은 결국 ‘사랑’이다.


부대를 이끄는 대위(올란도 실)는 죽음을 무릅쓴 불가능한 미션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은 숭고한 일이라고 연설한다. 그리고 등장한 포와로(케네스 브래너).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부대원들의 목숨을 구하지만 임무가 끝난 시점에서 발생한 사고는 막지 못하고 대위는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 역시 얼굴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다친 그를 찾아온 그의 연인 캐서린(수잔나 필딩). 그녀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포와로에게 콧수염을 기르라는 조언을 하며 사랑으로 그 상처를 덮는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나는 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나일 강의 죽음>은 자신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관객들에게 분명히 인지시키며 시작된다.



케네스 브래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이어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모두에게 잘 알려진 추리 소설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서의 도전을 시도한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도전. 브래너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전 편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이번 <나일 강의 죽음>을 조금 과격한 시선에 밀어붙여본다면,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두 편 모두 추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브래너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돌이켜보자.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포와로의 추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은 영화의 러닝 타임을 기준으로 절반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점이었다. <나일 강의 죽음>은 더하다. 2시간을 살짝 넘기는 러닝 타임의 이 영화에서 살인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추리가 시작되는 시점은 영화가 정확히 절반 지점에 도착한 순간부터이다. 이러한 두 영화의 특징은 기존의 후더닛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그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범인이 누군인지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동력으로 굴러가는 수많은 후더닛 영화들과 다르게, 브래너가 연출한 두 편의 후더닛은 추리와 그를 통한 서스펜스의 핵심인 살인 사건을 극 시작 후 최대한 늦게 배치시키며 서스펜스를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이 터진 후, 용의자들을 심문하기 시작하는 포와로. 이 심문 장면들에서는 후더닛 영화에서 흔히 탐정들이 추리를 하는 순간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는 하는 그 흔한 플래시백 효과조차 사용되지 않는다. 후더닛에서 찰나의 플래시백의 역할은 천재 탐정들은 발견할 수 있었을 단서이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설명서이다. 이 영화는 후더닛의 플래시백, 즉 설명서를 없앤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설명서를 없앰으로써 관객들에게 용의자들을 심문하며 범인을 향해 나아가는 포와로의 추리가 무용함을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


그렇게 진행되던 포와로의 심문. 그리고 이 영화는 마침내 후더닛 특유의 플래시백을 보여준다. 바로 포와로가 맡고 있던 비밀 임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아들 부크(톰 베이트먼)의 연인인 로잘리(레티티아 라이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페미아(아네트 베닝)는 포와로에게 의뢰하여 로잘리의 신상을 캐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포와로가 그 당사자들에게 그러한 임무를 고백하는 순간, 이 영화는 첫 후더닛 플래시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후더닛 플래시백은 이후, 부크가 로잘리와의 결혼을 위해 리넷(갤 가돗)의 목걸이를 훔쳤던 것이 밝혀지는 순간과 살인 사건의 배후가 사이먼(아미 해머)과 재클린(엠마 맥케이)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다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추리의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는 후더닛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심문은 이렇게 총 세 개의 심문이다. 이 세 심문의 공통점은 모두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의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나일 강의 죽음>은 범인을 추리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을 추리하는 순간에 관객들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이렇게 후더닛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어떠한 행동까지 할 수 있게 만드는가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탐정의 추리를 영화 시작 후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전개하여 추리 영화의 서스펜스를 배제하면서까지 앞선 전반부의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도 보여준 것은 이 영화가 추리 영화가 아닌 사랑 영화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원작에 없는 내용의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선언하며 시작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영화 내내 고수했다고 볼 수 있다.





케네스 브래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추리 소설 기반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들이 정의(定義) 하는 정의(正義)에 대해서 탐구를 했다면, 이번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추리 소설 기반의 이야기 안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탐구한다. 결국 케네스 브래너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원작 소설들에서 발견한 것은 수많은 용의자들 사이에서 범인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에 발생하는 서스펜스 가득한 오락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 군상이 보여주는 그들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그 인간들의 모습을 탐구하기 위해 케네스 브래너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인이 누군지를 알고 있는 추리 소설을 다시 한번 스크린으로 옮기는 도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브래너의 <나일 강의 죽음>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이 난다. 추리 소설에서 추리를 발라내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탐구한 이 영화는 추리를 중심으로 하는 극적의 서사가 발라내지고 사랑을 중심으로 한 평이한 드라마만이 남은 듯한 모양새다. 이렇듯 브래너가 연출한 <나일 강의 죽음>은 추리 없는 추리 영화라는 과감한 도전이 아닌, 평범한 사랑 이야기로 기억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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