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리코리쉬 피자>를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비슷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했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초기작 <부기 나이트>나, 이 영화 비슷하게 달달하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펀치 드렁크 러브>가 <리코리쉬 피자>를 보면서 대번에 떠올릴 수밖에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사랑이라는 범 대중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얼핏 들으면 이미 봐왔고 익숙한 설정이기에 식상한 영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산 페르난도 밸리를 배경으로 자신이 간직한 그 시절, 그 공간에 대한 향수와 그 아련한 감정을 더욱 간지럽히는 사랑 이야기를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버무려 능숙하게 결합시키며 다시 한번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사랑 영화인 동시에 성장 영화다. 그리고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영화의 서사 속에서 사랑과 성장을 거의 같은 개념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랑과 성장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한다. 성장하기에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에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동하는 개념의 중심에 놓여있는 인물이 주인공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다.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학교의 화장실을 보여준다. 졸업 사진 촬영을 앞두고 있는 15살 소년 개리는 친구들과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신 빗질을 해댄다.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화장실에서는 폭죽탄이 터지고 개리는 화장실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는 밖에서 졸업 사진을 촬영하는 사진 기사의 보조 역할로 학교에 와있던 알라나를 보게 된다. 영화의 이 첫 순간은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뜬금없는 순간은 사랑의 첫 순간은 으레 그렇다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폭죽탄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큰 파장을 내며 시작된다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러한 생각은 사실 <펀치 드렁크 러브> 속 자동차 사고와 오르간을 통해 한번 드러나기도 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심지어 개리는 미성년자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 두 남녀 사이에 나이 차이라는 장벽을 심으며 둘 사이를 방해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 역시 이러한 장벽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개리는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등 알라나와 동등해 보이기 위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성숙해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알라나는 번번이 개리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보이고는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바라보며 개리를 아이 취급하며 밀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 속에서 영화는 알라나를 중심으로 이 둘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개리가 아닌 알라나가 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더욱 들어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개리는 자신이 알라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반면, 알라나는 자신이 개리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알라나가 개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 영화는 총 네 명의 남성을 알라나와 연결시켜준다. 첫 번째 남자는 랜스(스카일러 거손도)다. 랜스는 개리와 함께 아역배우로 활동한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자는 홀든(숀 펜)이다. 홀든은 전설적인 배우로 모두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스타다. 세 번째 남자는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다. 그는 유능한 영화 제작자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남자는 조엘 왝스(베니 사프디)다. 그는 LA 시장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다.
알라나가 이 네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네 명 모두가 개리와 닮아 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리와 같은 아역 배우 출신 랜스는 알라나보다는 어린 것 같지만 개리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인다. 그러한 랜스의 나이는 알라나와 개리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장벽인 나이 차이라는 약점을 보완해 준다. 그리고 아역 배우를 하며 인기를 얻었던 개리처럼 배우로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홀든은 개리에게는 없는 어른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식당에서 늘 콜라를 외치던 개리와 다르게 홀든은 여유롭고 어른스럽게 마티니를 주문한다. 개리처럼 사업가인 존 피터스는 개리에게는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다. 피터스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개리를 찍어누르는 순간에 알라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보인다. 그리고 개리처럼 자신의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왝스는 개리와 다르게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알라나는 이 넷 중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다. 랜스에게는 식사 자리에서 알라나를 배려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며, 홀든은 알라나를 알라나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레인보우, 그레이스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존에게는 연인인 바브라가 있고, 왝스에게도 역시 연인인 매튜(조셉 크로스)가 있다. 결국 그들 중 누구도 개리가 알라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알라나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과 알라나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내 개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 알라나. 그는 개리를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앞서 보여주었던 장면에 변화를 주어 이 극적인 순간을 완성한다. 영화 내내 닿을 듯 말 듯 한 관계를 유지하는 두 인물은 한 번씩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개리가 살인범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게 채포될 때 알라나는 그를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홀든의 바이크에서 알라나가 떨어졌을 때는 개리가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이 두 번의 달리기 장면은 모두 두 인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뛰는 것으로 촬영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개리와 알라나가 서로를 향해 뛰어갈 때 이 두 번의 달리기 장면은 다시금 겹쳐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라나의 달리기에 변화를 준다.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와서 개리를 향해 달려가던 알라나의 앞선 장면의 진행 방향을 반전 시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뛰던 그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뛰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리하여 내내 엇갈리던 두 남녀는 마침내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사랑을 완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