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2024)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질문으로 끝닜다. 첫 번째 역사가(The First History Man)의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끝맺었던 해당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다시 말해 <퓨리오사>는 조지 밀러 감독이 9년 만에 위 질문을 향해 내놓은 대답에 관한 영화다. <퓨리오사>는 무기체가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 이 영화 속에서 유기체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 희망은 오직 유기체에만 존재한다.
문명 붕괴 후 45년이 흐른 시점에서 <퓨리오사>는 시작한다. <퓨리오사> 세계관 속 지배자는 무기체다. 영화의 첫 번째 챕터에서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압도하는 무기체의 모습이 그려진다. 부발리니가 타는 말은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를 납치해 가는 바이크족의 바이크를 따라잡지 못한다. 도망치는 퓨리오사를 따라가는 바이크족 남자는 덤불에 걸려 힘없이 넘어진다. 넘어진 남자를 바라보는 카메라. 그 순간 굉음을 내면서 바이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무력한 유기체와 강인한 무기체의 원리로 작동하는 해당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무기체가 지배하는 세상답게 영화 속 권력자 역시 무기체와 같이 행동한다. 바이크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작전을 위해 자신을 따르던 옥토보스(고란 D.클루트)의 부하 ‘굴욕자들’을 가차 없이 소모한다. 시타델의 임모탄 조(리치 험) 역시 모두 똑같이 하얗게 몸을 칠하고 개성이 말살된 워보이를 비슷하게 다룬다. 이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기계 부품과 같다.
무기체는 누군가에 의해 작동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겐 자유의지가 없다. 영화 속에서 디멘투스와 임모탄 조가 내리는 모든 행동은 ‘한정된 자원’과 연결돼 있다. 다시 말해 문명이 무너진 세상 속 한정된 자원이 그들만의 힘의 논리를 완성하고, 이것이 그들을 작동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두 캐릭터가 영화 내내 다소 편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부분 역시 납득 가능해진다.
<퓨리오사>의 결말부에 결국 두 세력이 대결한다. 무기체와 무기체의 전쟁.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두 세력 간 전쟁의 껍데기를 벗겨내면, 이 영화가 진짜 그리고 있는 전쟁이 무엇인지 보인다. 유기체와 무기체의 전쟁. 자유의지 없이 작동하는 무기체를 악역으로 둔 이 영화는 그 대척점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유기체를 두고 있다. 희망은 유기체만이 할 수 있는 자유의지 속에 담겨있다. 그렇기에 희망은 오직 유기체에만 존재한다.
<퓨리오사>의 이야기는 퓨리오사의 의지에 따라 쓰여진다. 퓨리오사의 의지는 복수에 의해 작성된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퓨리오사>는 복수라는 서슬 퍼런 감정조차도 무기체는 꿀 수 없는 유기체만이 꿀 수 있는 꿈이라 말한다. 복수를 다루고 있기에 이 영화는 더욱 뜨겁다. 뜨겁게 타오르는 인간의 감정과 황무지를 때리는 뙤약볕이 조화를 이뤄 스크린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감정적이다. 친구에게 자신의 것보다 더 싱싱한 열매를 따주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 그녀는 씨앗을 주며 도망가라는 어머니 메리 조 바사(찰리 프레이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디멘투스에게 돌아간다.(이때 디멘투스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속 인공지능 로봇 T-800처럼 퓨리오사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감정 없는 무기체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중반부터는 잭(톰 버크)과 연대를 이룬다. 잭은 이 영화 속에서 부하를 부품으로 여기지 않는 거의 유일한 리더인 만큼, 퓨리오사와 잭의 연대는 <퓨리오사> 세계관 속에서 필연적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퓨리오사의 복수는 완성된다. 퓨리오사는 시타델 꼭대기 어느 한 공간에 나무를 심는다. 그 나무는 디멘투스 위에 심어진다. 그 나무는 디멘투스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생명의 상징으로 삼는 물, 혹은 나무. <퓨리오사> 속 마지막 나무 역시 명백하게 생명을 상징한다. 무력한 유기체와 강인한 무기체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영화는 유기체에 무릎 꿇은 무기체의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무기체의 세상, 희망은 오직 유기체에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