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Here, 2024)
히어(Here, 2024)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시간의 각인’에서 영화감독이 하는 작업의 본질을 ‘시간을 조각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자신의 신념하에 ‘시간’, 그리고 거기에 동반한 ‘공간’을 다루며 일생 동안 영화를 만들었다. 난 영화란 시간과 공간을 조각한 끝에 탄생하는 예술임을 믿는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를 비롯해 수많은 감독이 세상 밖으로 내놓은 시공간의 조각품은 카메라에 뿌리를 둔다. 카메라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카메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도구이자, 영화 예술의 모든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필모그래피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출세작인 <빽 투 더 퓨쳐>는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남자의 일생을 다룬 <포레스트 검프>는 <펄프 픽션>, <쇼생크 탈출> 등의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저메키스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기기도 했다. 그렇게 저메키스는 시간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시간을 조각해 왔다. 그런 저메키스가 <히어>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 일생의 테마인 시간을 다뤘다.
리처드 맥과이어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는 저메키스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100분 여의 러닝 타임 동안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단 한 곳에 고정돼 있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한 장소에 멈춰서 그 공간을 통과하는 시간을 담는다. <히어>의 시간은 공룡이 멸종하는 백악기 말기부터 현재까지를 지나간다(해당 설정에서는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속 인상적인 초반 시퀀스가 문득 스치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다. 앞서 말했듯 카메라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카메라의 가장 큰 무기이지만, 이 영화는 스스로 공간에 제약을 둔 것이다. 거기다가 시간을 마구 뒤섞는다. 이 영화는 집 거실의 빈 공간에 2개의 의자를 세우는 리처드(톰 행크스)의 모습으로 시작해 중생대로 거슬러 간다. 그리고 중생대에서부터 시간을 다시 거꾸로 돌려 현재로 가는 것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마무리한다.
<히어>가 다루는 타임라인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선사 시대, 영국에 투쟁했던 식민지 시대, 그리고 20세기, 21세기의 많은 전쟁과 각종 팬데믹이 스쳐 간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해당 시간의 이야기를 비선형적으로 펼쳐낸다. 공간의 제약 속에서 영화 예술의 백미인 ‘편집’을 통해 마음껏 시간을 주무른다. 저메키스는 그렇게 시간을 조각하며 이 영화의 형태를 빚는다. 그 안에서 그는 시간을 각인한다.
대략 6,000만 년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은 이 영화는 뒤엉킨 시간을 절묘한 편집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낸다. ‘삶의 순환(Circle of Life)’을 말하며 운명론의 시선을 내심 내비치는 듯한 이 영화는 그만큼 장엄하다. 그리고 저메키스는 이 장엄한 영화의 틀 속에 그가 그동안 자신의 영화를 통해 보여온 소박한 감동을 심어놓는다. ‘시간의 각인’을 꿈꾸는 이 영화는 결국 ‘기억의 각인’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을 예찬한다.
영화의 마지막. 리처드는 치매에 걸린 아내 마가렛(로빈 라이트)과 함께 추억이 깃든 집으로 들어선다. 텅 빈 거실. 두 쌍의 의자. 거기에 앉은 부부. 리처드가 들려주는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듣던 마가렛은 치매로 인해 잊고 살았던 기억을 상기해 낸다. 행복했던 기억을 기어코 상기해 낸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퇴적층이 기억의 퇴적층으로 치환되는 바로 그때. 영화 내내 한 곳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비로소 움직인다. 옛 추억을 떠올린 마가렛이 추억의 장소인 거실을 돌아보자, 카메라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부부의 뒷모습을 잡는다. 돌아보는 마가렛의 움직임을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이 영화는 스쳐 간 시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기억을 말 그대로 ‘돌아본다’.
그리고 점차 집 안에서 멀어지는 카메라.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공간을 벗어난 카메라는 하늘 높이 올라가 영화의 배경이 된 집 옆에 늘어선 마을의 수많은 집을 비춘다. 이 영화를 한 공간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공간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순간. 특수성을 다루던 영화가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그렇게 이 영화는 관객들 저마다의 그곳(Here)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