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실 멕시코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트로츠키가 살았던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이었죠. 저는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메일을 열어 확인해 봤습니다.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ESTA)의 신청 상태가 변경되었으니 확인해 보라는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ESTA를 열흘 전쯤 신청해 승인을 받아둔 상태였습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당장 ESTA 홈페이지에 들어가 상태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상태가 승인에서 거부로 바뀌어 있더군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들어가기까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제 신청이 거절된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범죄 이력도 없고, 과거 미국에 입국했던 적도 없습니다. 이란이나 쿠바, 북한처럼 미국이 지정한 테러지원국에 입국한 경력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ESTA가 거절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승인을 받았다가, 나중에 거절로 상태가 바뀌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ESTA는 승인된 뒤에도 주기적으로 점검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특별한 일 없이 상태가 변경되는 사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저기 알아 보았지만, 이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비자 면제 프로그램에서 거절을 받았으니, 미국 대사관에서 공식적인 관광 비자를 받아야 했죠. 하지만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제가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미 ESTA가 승인되었던 상태였으니, 저는 당연히 비행기와 숙소를 모두 예약해 둔 상태였습니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항공권과, 미국 안에서 움직이는 항공권, 미국에서 나와 태평양을 건너는 항공권까지 전부 예약된 상태였죠.
이 모든 티켓을 전부 취소해야 했습니다. 가장 싼 가격의 항공권을 골랐기에, 돌려받은 돈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안 그래도 빠듯했던 여행 비용에는 손해가 막심했습니다.
여행 일정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칸쿤에서 토론토에 들렸다가, 거기서 뉴욕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죠. 하지만 가야 할 길은 막혔고, 열흘 가까이 계획했던 미국 여행 기간이 그대로 비워지고 말았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토론토와 밴쿠버에서 조금씩 나누어 시간을 쓰기로 했죠. 처음에는 아무 일정도 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제게만 닫힌 국경은 더 야속하게 느껴졌죠.
하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마침 토론토에 살고 있던 가까운 지인의 집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상황을 들어 보니, 제가 예정대로 미국에 갔다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막혀버린 국경 덕분에 함께 며칠을 보낼 수 있었던 셈입니다. 오랜만에 밤이 가는 줄 모르고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의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에 한 번은 도시를 옮기고, 새로운 것을 만나며 열 한달을 보냈습니다. 부족했던 제 시간도 토론토에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갔다면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녔을 스스로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오랜 기간 여행을 했지만, 여행자는 여행자일 뿐입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의 곁에서, 그들의 삶을 느끼기에는 충분치 않은 시간들이었죠. 오래 머물렀던 국가나 도시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텔에 머물며 식당에서 밥을 먹는 여행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도시에 머물며, 거주민들의 삶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여행의 경험이 되겠죠.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 며칠을 지나면 다시 보이기도 했습니다. 궁금한 것도 오히려 많아지더군요.
토론토에서는 계획에 없던 나이아가라 폭포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폭포 건너편, 아주 가까이 미국 땅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저게 미국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가지 못한 미국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게는 막힌 국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행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갑니다. 남은 국가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남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천히 귀국을 준비해야 할 때도 왔습니다.
하지만 여행의 마지막까지도 이런 예상 밖의 일은 언제나 벌어지겠지요. 여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변칙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니까요. 메일 한 통에 모든 것이 변해버린 순간,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여행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제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것이 막힌 순간, 이번에 저는 적절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의 도움과 운이 많이 따라준 결과물이었죠. 남은 여행에 필요한 온기와 환대를 충분히 얻고 토론토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앞으로의 여행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도 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새로운 기회를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 그렇게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또 당황하고 어지러운 시간이 이어지겠지만, 그 뒤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겠죠. 그것이 ‘기회의 땅’ 미국이 제게 선물해 준, 저만의 ‘아메리칸 드림’이 아닐까 농담처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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