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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더슈탄트 Dec 11. 2023

[일본] 01. 식민 혹은 근대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긴 비행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 발리를 경유해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까지, 이틀 내내 비행으로 가득한 일정이었죠.


 시드니에서 삿포로까지, 직선으로 8500km를 넘게 북쪽으로 왔습니다. 그 사이 적도를 넘어 계절은 겨울이 되었죠. 한 해 내내 여름을 따라 지구를 돌았는데, 드디어 올해의 첫 눈을 맞게 됐습니다.


 도쿄에서는 약간 덥게 느껴졌던 외투가, 삿포로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기는 도쿄에서도 거의 1,000km가 떨어진 북방의 도시니까요.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북쪽이라는 것이, 삿포로와 홋카이도를 설명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일 것입니다.


삿포로의 밤


 사실 근대 이전까지 홋카이도는 일본의 역사에서는 비껴나간 존재였습니다. 에도 시대까지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영토는 지금의 혼슈와 시코쿠, 큐슈 지역이었죠. 그때는 오키나와도 홋카이도도 일본의 영토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홋카이도에는 ‘아이누’라 불리는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지금의 하코다테 지역 정도를 장악했을 뿐이었죠. 이곳에 있던 마쓰마에 가문이 나머지 홋카이도 지역과 교역을 하며 아이누를 간접적으로 통제했습니다.


 그러던 홋카이도가 일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러시아의 남하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건너 일본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죠. 소위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조선, 중국, 류큐, 네덜란드를 제외하고는 무역하고 있지 않던 일본에게 이것은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흔히 일본의 개방과 근대화에 영향을 미친 국가로는 미국을 많이 꼽습니다. 일본이 처음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미국이었으니까요. 아니면 법체계의 영향을 받은 독일이나, 동맹을 맺고 영향을 주고받았던 영국을 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초기 개혁과 근대화에 가장 촉매가 되었던 존재는 러시아 제국이었습니다. 과장된 안보 위협을 느낀 에도 막부는 홋카이도를 직할지로 편입하고 지역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후 사할린과 쿠릴 열도 방면으로 확장하며 러시아와 충돌하기도 했죠.


홋카이도 개척의 중심지였던 오타루 항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에도 홋카이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일본인에게 아이누가 살던 광활한 홋카이도는 무주지나 다름없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일본은 근대화 개혁의 다양한 실험을 홋카이도에서 진행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위한 ‘개척사(開拓史)’를 설치하고 계획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을 모델로 삼아 농지를 개간하고 공장을 세웠죠. 실제로 여러 미국인 고문단이 홋카이도에 와서 개척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홋카이도를 향하는 이주민도 늘어났습니다. 우선 메이지 정부는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홋카이도에 정착시킨 뒤, 그 대가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일종의 둔전병을 설치한 것이죠.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일반 농민들의 정책적 집단 이주도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사람을 심는’, 식민(植民) 정책을 일본으로서는 처음 시도해 본 것이죠. 이런 점에서 홋카이도는 분명 일본의 영토였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지의 특성을 띤 지역이 되었습니다.


옛 개척사 본청사 자리는 공사 중이었다.


 이 시절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홋카이도에 짙게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개척사의 상징인 붉은 별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죠. 개척사 맥주 양조장의 후신인 ‘삿포로 맥주’의 로고에 별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홋카이도 대학 역시 개척사 시절에 설치된 삿포로 농학교의 후신입니다. 근대화의 첨병에 섰던 홋카이도답게, 삿포로 농학교는 일본 최초로 학사학위를 수여한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일본의 근대 과학과 외교를 이끈 여러 사람들이 탄생하기도 하죠.


 이 학교의 교장이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로 유명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입니다. 그 역시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미국에서 초청한 고문이었죠.


홋카이도 대학 안의 클라크 박사 동상


 물론 이 흔적이 언제나 긍정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죠. 근대의 명과 암은 언제나 공존하기 마련이니까요. 모든 지역에서 그렇겠지만, 일본의 ‘내지(內地)’이자 식민지였던 홋카이도에서는 ‘근대화’와 ‘식민지’라는 한 쌍의 개념이 무척이나 가까이 흡착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원주민이었던 아이누인에게는 상처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인이 가지고 있었던 토지의 소유권이나 재산권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죠. 홋카이도 정복이 본격화된 뒤에는 아이누의 정체성도 크게 탄압했습니다.


 일본은 수렵을 위주로 생활했던 아이누에게 수렵을 금지하고 개간과 농경을 강요했습니다. 아이누식 이름도, 아이누어도 사용할 수 없도록 했죠. 일본이 아이누를 일본에 현존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것은 2008년이었고, 선주 민족으로 인정한 것도 2019년에 들어서였습니다.


옛 삿포로 재판소


 지금에 와서도 ‘내지이자 식민지’라는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홋카이도는 넓은 영토를 기반으로 일본의 식량 공급을 상당 부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밀이나 콩의 경우엔 거의 대부분이 홋카이도에서 나오고, 우유의 경우에도 절반 이상이 홋카이도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홋카이도가 현대 일본에서 그만큼의 대우를 받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20여년 째 홋카이도의 인구는 계속해서 줄고 있고, 지방의 인프라는 확충되지 못하고 있죠. 적은 인구밀도와 가혹한 환경을 고려해야겠지만, 철도도 도로도 사정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철도민영화를 전후해 노선의 3분의 1 이상이 폐선됐을 정도죠.


삿포로의 밤


 결국 이 거대한 북방의 섬에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걸어 온 근대사의 영광과 상처가 모두 깃들어 있는 셈입니다. 모든 곳에서 그렇겠으나, 홋카이도만큼 일본 안에서 그 대조가 극명한 곳은 또 찾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런 땅에서 저는 이제 일본 여행을 시작합니다. 식민과 근대가 늘 함께 서 있는 이 땅에서 일본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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