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국을 태우고서

냄비를 닦아내고, 새로 국을 끓여도 미미하게 남아 있는 그 탄내.

by 백아

언제는 미역국이 너무 먹고 싶은 날이었다. 집구석 어디에 미역을 놔둔 기억이 있는데 하며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찾은 한줄기 미역. 미역을 물에 불려다가 기다렸다. 삐쩍 말랐던 것이 어느샌가 생기를 찾고는 물 속에서 흐느적 거린다.


고기를 기름에 볶고 미역도 볶고 물을 넣고 간을 하고 푹 끓이면 간단한 미역국 완성이다. 뭉근하게 끓이면 미역국의 색도 잘 드러나고 맛도 더 좋아지는 기분이다. 숟가락으로 살짝 국물을 떠서 입에 슬며시 갖다대었다. 후르륵 맛있는 소리와 함께 짧은 감탄이 나왔다. 내가 했지만 진짜 맛있게 됐다며 뿌듯했다. 불을 끄고는 무척이나 신나는 마음으로 그릇에 국을 담았다.


그리고 다음 날. 퇴근길에 어떤 저녁을 해 먹지 생각하던 차에 끓여놨던 미역국을 다시 먹기로 했다. 나의 특성상 똑같은 음식을 연달아 먹는건 피해왔지만, 이번은 예외이다. 미역국이 꽤나 맛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저녁 메뉴를 뭘로 할 지 고민을 안 해도 좋았고. 따끈한 밥에 미역국 하나면 훌륭한 저녁이 아닌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미역국을 데우기 시작했다. 가장 약한 불로 설정해 두고는 욕실로 향했다. 안 그래도 먼지를 뒤집어 쓴 터라 빨리 씻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온도로 물을 맞춰놓고 샤워기를 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하면 충분한 온도가 올라온 것이다.


한껏 물을 맞으며 온갖 잡생각들이 떠오르다가 이내 가라앉고 만다. 모두 물에 흠뻑 젖어가지고는 죄다 하수구로 빠지는지. 씻는 행위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들었었는데 사실인가 싶다. 이 순간과 온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물멍을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코끝에 쿡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처음에는 아랫층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가 싶었는데 묘하게 담배 냄새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냄새일까? 의문만 남긴 채, 샤워기를 내렸다. 몸을 수건으로 닦고 로션도 바르고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훅 들어오는 매캐한 냄새.


'아!'


순식간에 몸이 문밖으로 튕기고는 주방의 냄비를 살폈다. 역시나 냄비가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그토록 맛있게 끓였던 미역국은 온데간데 없고 까맣게 타버린 무언가가 남아있을 뿐이다. 말 그대로 홀랑 다 태워먹었다. 다만 냄비까지 모두 태운 건 아니어서 냄비만은 어찌저찌 건질 수 있었다.


불을 가장 약하게 했고 펄펄 끓이려고 한 적도 없다. 결국 그렇게 약한 불로도 시간이 지나면 국물이 모두 졸아버리고 미역과 고기는 새까맣게 타버리고 만다. 국을 끓이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과정과 참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은가 싶다.


내 사랑은 무엇인가. 미역국으로 친다면, 갓 만들어낸 미역국일까. 아니면 몇 번을 끓여만든 미역국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쫄쫄 말라붙거나 다 타버린 미역국이려나. 사랑의 온도는 무척이나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졸이고 졸이다 보면 다 말라버린 국물처럼 타버릴지도 모른다. 깊은 맛이 날 지는 몰라도 그 끝맛은 쓰거나 탄맛이 난다.


아쉽게도 나는 사랑의 끝맛이 어떤건지 모른다. 막연하게 사랑이란 걸 알지만 깊이 알고 있지 않다. 내 사랑은 모두 다 태워버린 미역국이었던 까닭이다. 나 혼자 열내다가 혹은 팍 식어서는 결국, 불조절에 실패했다. 그 어떤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어선지 나는 끝내 사랑을 모두 읊조릴 수 없다.


나는 다 졸아버려 타버린 미역국을 버렸다. 새까맣게 문들어진 냄비를 박박 닦으며 다음 인연을 기다린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탄내가 다 빠진 것 같지 않지만 그날 저녁, 말없이 나는 냄비를 닦아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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