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감정들을 쌓아둬서 뭘 하려고?

겉만 어른, 속은 어린애

by 백아

나는 감정표현을 하라고 한다면 이마에 땀이 나는 듯하다. 실제론 땀을 주르륵 흘릴 정도로 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난처하고 복잡한 이 감정은 표현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어릴 적 일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늘 억제하고 참는 쪽에 익숙하다. 부모님은 말수가 별로 없는, 그다지 집안이 생기가 도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 왔어

- 응, 씻어

- 배고파

- 그래, 밥 먹자


누군가는 굳이 그 말들에 대답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마치 서로 ‘고요 속의 외침’을 하는 것 같은 느낌 아닌가? 우리 가족은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말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언제나 떠드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웃음인지, 슬픔인지도 모를 TV속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의 아버지는 꽤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과묵하다고 해서 무게감 있다고 느끼거나 진중하다는 뜻은 아니다. 말이 없다일 뿐이지, 행동은 하나하나가 컸다. 감정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줬던 까닭이다. 좋은 김정에서 비롯된 표현보다는 마이너스 감정에서 시작된 게 많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와 절대 친해질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다른 의미로 묵묵부답이다. 그녀의 과거를 보면 숨 쉬고 산 게 용할 정도로 콱 막힌 환경에서 자랐다. 온종일 눈치, 또 눈치. 눈치와 인내로 점철된 삶이었다. 자연스레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잊게 되었고, 그 끝은 도망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상관없다는 식의 내던짐은 자신을 점차 불행하게 할 뿐이었다. 지금도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두루뭉술하게 답하고는 넘길 뿐이다.


- 살다 보니 만났다.

-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어머니는 적게라도 표현을 하긴 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걸 피곤해했다. 본인이 어떤 감정인지 말하는 걸 ‘눈치’를 보는 건지, 잘 모르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말로 설명하는 건, 무척이나 고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일은 아득하다.


극적으로 감정이 끓어오르는 단편적인 예로는 꾸중을 들을 때이다. 어릴 적에는 혼날 때마다 나는 입을 꾹 닫아버리는 아이였다. 부모님은 도대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했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복잡한 이 감정을 말로 할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어떤 날에는 부모님이 한 푼 두 푼 모으는 돈을 몰래 훔쳐 쓰다가 걸렸다. 그런 날에도 나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이 말이 입 밖에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어째선지 나는, 억울하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었을 뿐이다.


'그냥 용돈을 주었으면 됐잖아!'

'언제는 뭐라도 해 주긴 했어?'


이러한 똥고집과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태도로 일관했었다. 그 결과는 몇 개의 매가 부러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끝끝내 그 매를 다 맞았다. 아프니까 이리저리는 뛰어도 집 밖으로 도망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일그러짐이 한 방울, 두 방울씩 텅 빈 마음에 떨어져 담기기 시작했다. 향수를 만들 때, 베이스 노트가 가장 오래 남는 향인 것처럼 결국, 이런 성향이 다 커버린 성인이 되어서도 남아있다. 나이를 먹은 것만큼 문제에서도 여유롭게 대처하고 해결할 줄 알았는데. 나도 잊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부모님보다는 표현을 잘하는 편이라고 여겼을 터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욱 단단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를 꽁꽁 숨기고 덮어버리는데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른바 그러려니, 시큰둥, 무관심 등 자신을 그 상황에서 격리시켜 버리는 상황인 셈이다. 어쩌면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떤 문제를 마주하게 될 때면 그대로 맞아버리는데, 그저 요지부동이다.


최근에는 큰 감정의 부딪힘이 있었는데, 서운함과 오해로 둘러쌓인 상황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바로 어릴 적으로 돌아가버렸다. 격동의 순간에는 감지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부끄러움만 남았다. 대답도 똑바로 하지 못하고, 희미하고 작게만 겨우 내뱉었을 뿐이다. 서툴기 그지 없다.


따지고 보면 감정표현은 어려울 게 아니다. 희로애락에 기반한 어떤 단어로 표현될 수도 있고, 표정과 몸으로도 나타난다. 나는 표정이나 몸으로는 잘 나타내도 말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나는 대화를 통해 감정을 전하고 표하는 것이 아주 어색하다.


서운하다, 사랑한다, 행복하다, 섭섭하다, 미안하다, 질투 난다 등 수많은 단어들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째서 내 감정을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걸까. 생각건대,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거절, 승낙을 경험해 본 게 현저히 적은 탓이다.


요즘은 더욱이 개개인의 삶에 집중된 나머지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깨닫는 일이 적다. 나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일이 많지 않다. 이야기해도 이미 알고 있고 편한 사람들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과 부딪혀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습된 모형이나 기계화되고 패턴화 된 거로는 이루지 못할 인간 고유의 영역 아닐까.


나는 불분명한 타인의 바다에 빠져보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이제야 빠져보는 중이다. 내 몸 못 가누고 이리저리 떠돌지만 헤엄도 물에 빠져야 할 수 있는게 아니던가. 그리고 언젠가는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그래야 나는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전히 사람이 되려면 멀었다. 가죽은 성인이지만, 속은 여전히 10살짜리 꼬마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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