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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Aug 31. 2021

시들지 않는 이야기

청소를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벗 삼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어디선가 "툭 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밖에서 나는 소리를 착각한듯싶어 다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이번에는 "투두둑 툭"'하고  뭔가 묵직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베란다 창고 문이 빼꼼히 열려있고 박스 하나가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창고 문을 열자 선반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꺾여 있고 책들이 쏟아져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작년에 담가 논 매실과 마가목, 아로니아 항아리는 무사했다. 간신히 선반 위에 걸려 있는 박스들을 하나하나 꺼내 밖으로 옮겼다. 책으로 가득 찬 박스들은 커다란 돌멩이가 든 것처럼 무거웠다. 이사 올 때 버린다고 엄청 버렸는데도 아까워 못 버린 책이 창고 안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버려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과 스케치북, 독서록이 빼곡했다. 고맙게도 20년이 다 되었지만 누렇게 변색된 것도 없고 곰팡이도 슬지 않아 상태가 좋았다. 


"이 일기 엄마가 잘 보관했다가 너희들 시집 장가가서 애 낳으며, 그 애들한테 엄마 아빠가 일기를 어떻게 썼는지 보여 줄 거야."

협박 아닌 협박을 하자 설마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던 아이들이 이 일기장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니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 쓴 일기로 그때의 학교생활 모습과 생활환경이 아이의 눈높이로 기록이 되어 있다. 저학년 때 쓴 일기에는"푸하하, 동생이 있어서 그나마  혹도 나고. 화도 나요. 동생 없는 사람은 불쌍해"라는 선생님의 댓글이 쓰여있었다. 지금은 인권 운운하며 일기장 검사가 사라졌지만 그 당시 아이는 선생님이 일기검사를 하면서 찍어준 도장보다는 댓글을 상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나는 일기에 푹 빠져 30~ 40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스승의 날 1일 교사로 참가했던 일, 아들이 밤새 열이 떨어지지 않아 응급실로 달려갔던 일, 상동에 있는 논으로 올챙이를 잡으러 갔다가 진흙탕에 넘어져 몽땅 진흙을 뒤집어쓴 일들이 고스란히  그곳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5학년 때 아이의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6월 어느 날 쓴 일기가 심하게 구겨지고 군데군데 찢어져 풀로 붙인 듯 보였다. 날짜를 보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오래된 기억은 깊숙이 가라앉아 쉽사리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서둘러 그다음 장 일기를 읽어 보았다. 제목만 보고도 그날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은 회사에서 하던 일이 빨리 끝나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들은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아들은 내 품에 안겨 대성통곡을 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데 같은 동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 00이 엄마가 오늘 일기장에 선생님이 무슨 말을 써 줬는지 궁금하다며 보여 달라고 하더란다. 보여줄 수 없다고 하자 강제로  빼앗는 바람에 넘어졌고, 그 과정에서 일기장이 찢어지고 말았단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이가 울고 있는데도 그 일기장을 보며 자기 아들 것과 비교를 한 모양이었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집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당장 쫓아가서  아이한테 왜 그랬느냐고 어른으로서 할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똑같은 어른이 되기 싫어 꾹꾹 눌러 참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다음 해 그 엄마는 남편 직장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부서진 박스에서 일기장과 스케치북을 꺼내  신문지를 사이사이에 넣고 옮겨  담아 인방 장롱 맨 위층에 올려놓았다. 상자를 바라볼 때마다 누군가에게  귀중한 것을  선물 받은  것처럼 마음이 꽉 차올랐다. 그리고 상자 안에 든 일기와 스케치북은 언제든지 내게 시들지 않는 나와 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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