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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Jun 02. 2021

남편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어요

퇴근 후 저녁을 먹자마자,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은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에 열중이다. 평소 같으면 소파에 길게 누워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자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실실 웃기도 하고 어쩔 때 안타까운 듯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벌써 일주일째다. 평소 게임이나 영회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기에, 무엇이 그를 그토록 빠지게 한 것일까 무척 궁금했다. 


언젠가 한번 심하게 골프에 빠져 골프에 살고 골프를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는 듯이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자신보다는 회사 업무상 필요해서 했던 것이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다르다. 그런 남편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몇 달 전 남편은 난생처음 주식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 쏠쏠함이라 해봤자 남편 같은 소액투자자인 개미들에게는 금액이 그리 크지 않아 푼돈 수준이었다. 그래도 딸아이 오피스텔 얻는데 어느 정도는 보탬이 됐다. 그 뒤로는 부쩍 주식에 관심을 갖고 투자 금액을 늘린 듯했다. 어쩌다 얻은 행운이라고, 더 이상의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말하면  "나도 그쯤은 알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한다. 그럴 때는 그가 무엇에 홀려 있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남편 고등학교 동창이  인터넷 경마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일이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 나, 자전거 사고 싶은데" 하며 그동안 검색해 놓았던 자전거들을 보여 준다. 그제야 남편이 한동안 컴퓨터에 빠진 이유를 알았다. 바퀴가 가늘고 몸체도 날렵한 자전거, 바퀴가 크고 두꺼운 산악용 자전거, 아무 곳이나 타고 다닐 수 있는 동네 자전거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격도 천차만별로 비싼 것은 몇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유튜브로 나에게 맞는 자전거 고르는 법과 자전거 사고를 방지하는 안전 수칙 공부는 물론이요, 동호회도 알아 둔 모양이었다. 순간 여태까지 남편은  자기를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니와 투자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언제나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며 아이들과  나를 먼저 배려했던 남편, 그런 남편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려고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라도  꼭 장만해 주고 싶었다. 


" 자전거, 사는 거. 그냥 그만둘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자전거를 타게 되면 아무래도 당신 혼자 너무 외로울 것 같아."

그토록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던 그가 뜻밖에도 나 때문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머뭇거리고 있다. 어이없게도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늘 함께 걷던 중랑천,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봤던 커다란 잉어와 오리들,  달달한 케이크와 과자가 맛있던 카페들이 떠올랐다. 휴일이면 차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달리다 먹었던 음식들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남편은 부부이기 이전에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셈이다. 나는 과연 그를 위해 이런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남편은 지금 나 때문에 망설이기도 하지만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 주겠다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 고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주위에 친구들도 주말 과부가 되기 십상이니 사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오랜만에 자기를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한 남편, 내가 그의 취미생활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나의 욕심을 위해 그 사람이 즐길 권리를 빼앗고 싶진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이제는 그가 새롭게 사랑할 새로운 애인을 선물하기로 했다. 헬멧을 쓰고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 멋지게 다른 세계를 달릴 그가  눈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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