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어풍차 Nov 04. 2020

강화도에서 길을 잃었다

부부란 무엇인지 느끼는 시간

가을이 깊어질 무렵이면 우리 집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진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시집 온 이듬해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벌어지는 모습이다. 거실에는 갈색으로 변한 인삼들이 바구니에 나란히 누워 있고 인삼을 가득 담은 찜기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홍삼을 만드느라 바쁘다. 아직 인삼 냄새에 익숙지 않는 아이들은 한약방이 따로 없다며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홍삼 만드는 과정은 꽤 번거롭고 복잡하다. 그래서 어머님 계실 때만 해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도 나는 그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햇인삼을 사러 강화로 갔다. 입구부터 차량이 얽히고설켜 엄청나게 혼잡했다. 알고 보니 5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정작 할 일은 잊은 채 내 눈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몇 해 전  이곳에 와  모임을 하는 언니들과 먹었던 으름을 찾아 나섰다. 바구니 속에서 배를 드러낸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강아지도 생각났다.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던 지푸라기 안에 나란히 들어있던 달걀도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알록달록한 천막을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여러 곳을 샅샅이 살피며 찾고 또 찾았지만 으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젠 여기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인가 하고 돌아서려는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천막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좌판에 으름을 놓고 팔고 계셨다.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크림 같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으름이 반가웠다.

가을이면 아버지는

  "우리 막내 주려고  아버지가  따왔지."

하시며 으름과 함께 참다래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셨다. 으름은 깨끗한 지역에서만 나는 가을 바나나이다. 막 익어 빼꼼히 속살을 드러낸 으름을 까 한입 먹으면 부드러운 속살이 씹히기도 전에 씨앗이 먼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으름은 맛은 있는데 은근히 씨가 많아 먹기가 번거롭다. 사실 그날 나는 으름보다는 그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없이 자꾸 어딜 가느냐고 채근하며 따라왔던 남편이 생뚱맞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인삼 파는 곳으로 갔다. 이곳 역시 장날답게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많다. 가판대에는 햇인삼과 함께 싱싱한 흙냄새가 넘쳐 너울댄다. 군데군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눈에 많이 띈다. 쌓인 인삼만큼이나 사람들의 흥정소리도 시끌벅적하다. 우리 앞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가격을 묻기도 하고 상인이 깎아주는 인삼을 맛보기도 하신다. 손에는 제법 많은 봉지가 들려 있다.  그 모습이 시선을 오래 붙든다.


 인삼을 사고 나오니 주차장은 이미 포화상태로 이중 심중으로 주차가 돼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차를 다른 차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편은 차를 빼기 위해 차량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이리저리 전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나는 주차장 밖에서 할머니가 팔고 있는 호박 고구마를 샀다. 그리고 서둘러 차가 주차된 곳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남편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다. 아차 싶어 전화를 걸었다.

"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또 무엇에  정신이 팔려 전화를 안 받아."

 전화기 저편에서 남편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순간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을 하며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차 안은 냉랭했고 침묵이  흘렀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가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들을  만나고 바다를 만나고 또다시 들을 만났다. 남편도 나도 길을 잃었다. 오랫동안 신뢰하며 믿고 달려왔던 그 길을 잃었듯, 우리는 길을 잃었다.


정답게 손을 잡고 인삼을 사러 나왔던 노부부가 떠올랐다. 주차장에서 열심히 운전 방향을 가르쳐 주던 부부의 모습도 떠올랐다. 퍼뜩 정신 들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비스킷을 살며시 건넸다. 남편이 멋쩍게 받더니  맛있게 먹는다. 깊어가는 가을이 우리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가을이 가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