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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 수혈

by 지서원



꽃이 피었다. 봄이 왔다. 아직은 찬 공기 속 어렴풋이 맡아지는 봄 내음으로도 설레기에 충분하다.

봄의 시작과 함께 <패왕별희> 재개봉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공간인 '아트나인'이라는 영화관에서.


마음을 먹고 봐야하는 영화가 있다. 오바를 좀 보태자면 목욕재계 후 정갈하고 차분하게, 온 마음을 바쳐 만나야 할 것 같은 영화. 내게는 <패왕별희>도 그 중 하나였다. 왜인지 쉽게 열어볼 수가 없었다. 올해 초봄, 다리를 다쳐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방구석에 들어 앉아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했다. 저절로 생각이 났다고 해야할까. 이유 없이 홍콩영화를 보고 싶었다. 중경삼림을 처음 볼 때가 생각났다. 감상 내내 '저게 뭐야' 하며 의구심을 가졌었으나 이틀 뒤 내 무의식은 자꾸만 그 분위기를 떠올리고 있었더랬지. 몇 년 전에 친구들이랑 갔던 홍콩식 선술집도 생각이 났다. 가 본 적 없는 홍콩의 밤거리가 느껴졌다. 그래 그런 몽환적인 느낌이 고픈가보다! <왕가위 필모그래피>에 여태 열어보지 못했던 <패왕별희>까지 얹어서 몽환수혈 좀 해야지 하던 찰나, 우연히도 내가 좋아하는 공간인 '아트나인'이라는 영화관에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시간표를 보니 딱 2회 상영. 내 스케줄과 비교해보니 가능한 딱 한 타임. 아직은 절뚝이지만은 놓칠 수 없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예매를 했다.


아직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왼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하고 열심히 걸었다. 아직은 이만큼 걸은 적이 없는데…. 아아. 사랑하는 것에 닿는 일이 쉬웠던 적이 있었나. 영화관이 있는 7번 출구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광고 없이 정시에 시작하는 예술관 특성상 영화 시작으로부터 10분이 지나면 입장이 금지된다. 조금 느긋하게 도착해야 했으나 오늘만은 살짝 빠듯했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췄으니, 자그마한 아트나인 도착이다. 따뜻하고 감미로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상영관 입구에서 판매하는 글라스 와인을 픽업하여 함께 영화를 만나러 가는 것은 그 공간을 사랑하는 나만의 방법. 와인을 담아주는 포켓이 달라졌다. 이 점도 사랑스럽다. 입장하기 전, 포스터를 선물로 받았다.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작품이었다. 지금까지의 과정만으로도 감성 수혈 30%.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 한 쪽 벽면을 장국영이 채울 줄 몰랐고, 세 시간짜리 영화가 그런 식으로 흘러갈 줄도 몰랐다.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명작으로 꼽는 작품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나오니 이미 밤이었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 홍콩거리마냥 느껴질리 없었지만 찬기운이 거의 가신 짙은 밤바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를 품고 있었다. 일단 몽환 수혈 50%. 남은 봄은 <아비정전>,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그리고 다시금 <중경삼림>으로 채워야겠다. 그렇게 어슴푸레한 5월이 다 갈 즈음엔 <기쿠지로의 여름>에 실린 테마곡이 듣고 싶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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