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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아름다운 우도

지난 여름의 2박3일 우도 머뭄기

by 지서원




7월이다. 여름이 문을 열었다. 발아래가 문턱이지만 떠밀리듯 넘고 싶진 않았다. 즉흥적으로 일주일 뒤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올여름엔 햇볕 한 줌, 모래 한 알, 땀 한 방울, 습도 1퍼센트를 샅샅이 느껴볼 터였다. '곧 다시 마감이 생기니까', '일상도 바빠질 테니까' 등의 이유를 핑계 삼았다만, 낱알 세듯 촘촘히 이번 여름을 보내고자 하는 이유가 뭔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티켓을 끊으니 일주일이 더디 지났다.



제주공항에 내린 나의 최종 목적지는 당일치기 코스로 유명한 작은 섬, 우도다. 나는 해가 지면 사람이 없다는 그곳에서 두 번의 밤을 보내려 한다. 우도행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자연 속에서 조용히 책 읽기. 두 번째 이유는 직접 운전하는 전기차를 타고 자유 느끼기. 세 번째 이유는 9주간의 에세이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구상하기. 목표들을 손에 쥐고 우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러 성산행 버스에 올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타자마자 배가 아파서 10분 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어야 했고, 30분을 더 기다렸다 탑승한 버스는 출발한 지 40분 만에 부품 문제로 멈춰버렸다. 나를 포함한 승객들은 비자림로 한복판에 내려 기약 없는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했지만. 깨끗한 도로 옆으로 몽밀한 수풀들, 흐리지만 탁 트인 하늘, 당황스러운 상황임에도 미소를 띠고 있는 여행자들. 이 모든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게 해준다. 마냥 신난 8살짜리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안리타 작가님의 이슬 머금은 단상을 몇 장 읽었다. 날씨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이 갓길에서 이뤄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나무가 울창한.



우도로 진입하는 도항선에 승선했다. 맑은 날에 다녀가라더니 오늘따라 바다와 안개와 하늘이 완벽한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물색도 아닌 것이, 하늘빛도 아닌 것이, 희뿌연 것은 안개가 안고 있는 색일까. 파도는 질감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사일런트 힐이나 미스트 같은 공포영화가 생각났다. 진귀한 광경이었다. 하선하여 멋진 앞마당이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작은 마당에는 노란 벤치가 두어 개 있었다. 짐을 풀고 이번 여행의 목표 중 하나인 전기차를 빌리러 갔다. 운전면허는 있으나 운전과는 담을 쌓은 내가 차를 몰겠다 다짐한 곳은 우도였고, 그 차는 세 발 달린 전기차라는 것이 웃겼다. 겁을 좀 먹었었는데 역시나 도전을 해보니 나름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검은 현무암 담벼락이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달렸다. 날씨가 흐려서 넓은 바다가 마냥 검었으나 아까 말했지, 질감으로 존재를 드러내어 멋스러웠다. 달리다가 내가 원하는 곳에 서서 바람을 느끼고 출발하고 싶을 때 다시 움직이며 자유를 느꼈다. 이 작디작은 섬 안에서 내가 오롯했다. 해녀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에서 물회를 먹었다. 먹색 돌담 사이로 핀 진홍빛 수국이 대비를 이뤘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해가 길다.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앞마당 벤치에 앉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을 반쯤 읽었다. 에피파니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한순간, 책을 덮고 고개를 젖혔을 때 공중에 떠있는 그 무언가……. 차가운 커피를 쭉 빨며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에피파니, 에피파니. 이 여름의 끝에 떠있을 나의 한 순간은 무엇일까. 촉을 세운 수많은 장면들이 내 마음을 과녁 삼아 무분별하게 날아든다. 하고 많은 신(scene)들 중 무엇이 대상을 받을 것인가. 여름이 다 갈 때엔 알게 될까. 우도는 여섯시면 가게들이 문을 닫아, 미리 사둔 육개장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이튿 날, 순환버스를 탔다. 예보에는 비가 온다고 하여 첫 날에 구매해둔 핑크색 우비를 들고 나갔다. 이세계 같았던 검멀레 해변에서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일기예보가 들어 맞지 않는 작은 섬..." 중얼거리며 가방에 우비를 동여맸다. 저 멀리 안개 낀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모래색 말과 나귀들. 근방에는 검은 용의 똬리만큼이나 어두운 숲의 입구가 마치 자비라도 베풀듯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지키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연예인이 왔다 갔다는 카페에서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엉덩이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돌 두꺼비도 만났다. 두꺼비의 엉덩이가 닳아있었다. 행운을 원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반질하게. 콩쥐야 뭐 됐어 라며 물벼락을 맞던 밈(meme) 두꺼비가 생각났다. 그만큼 유명해졌으면 너에게도 행운 아니냐며 내 식대로 재단한다. 나도 돌 두꺼비의 엉덩이를 마구 만졌다. 한 사람만큼의 윤이 늘었을 테다. 이른 저녁을 먹었다. 땅콩소스가 범벅이 된 수제버거였는데 단짠이 조화로워 꽤 잘 어울렸다. 오후 여섯 시, 하늘은 밝고 손님은 내가 마지막. 우도는 모든 게 일찍 끝난다. 육지 냄새를 매달고 온 나에게는 한창인 시간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우비를 풀어들고 꼼꼼히 입었다. 비가 조금씩 거세졌다. 이때다 싶어서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얼굴에 비가 튀고 이내 머리카락까지 흠뻑 젖었다. 어린 날, 아빠와 장대비를 맞으며 동네를 산책하던 오후가 생각났다. 아홉 살의 에피파니. 여름 향이 밀려올 때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파란 원피스를 입고 깔깔거리며 아빠와 걷던 어린 내가, 지금은 핑크색 우비를 걸친 채 낯설고도 아름다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제주는 푸르고 거멓고 흐리고 풀 내음이 나고, 빗물 머금은 거미줄엔 거미가 파르르르. 시선 끝 붉은 표지판엔 '천천히'가 적혀있다. 부디 천천히 흐르길 바라는 청춘을 대변하나. 어쨌든 그리 생각해 본다. 깊어진 밤만큼 허기가 덮쳐 맥주와 육개장 컵라면을 먹었다. 두 번의 밤을 함께 하는 육개장 컵라면. 단연코 우리나라 1등 컵라면.



다음 날 아침, 우도를 떠나는 발걸음 끝 선착장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도착했을 때보다 날이 좋았다. 며칠 전보다 맑아진 마음의 한 귀퉁이를 떼어주고 가는 것 같아 홀가분했다. 즉흥을 가미해 떠난 여행, 모든 계절을 흐르는 시간에 개어 온몸에 들이붓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곱씹어 보니 여름만을 촘촘히 보내고자 한 게 아니었다. 여름이 투명해서 내 마음이 잘 보였던 것이다. 성산항에서 내려 올레길을 걸었다. 시간 계산에 실패해 예기치 못하게 내린 동네에서는 골목마다 레몬녹차 향이 났다. 이 또한 선물. 제주는 그런 곳이다. 작은 섬에 두고 온 기억 조각을 떠올리면 남은 계절도 못 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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