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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26. 2017

우리의 흥보, 우리의 자화상

:: 국립창극단 흥보씨


대한민국 드라마 서사구조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가난하고 힘없는 비련의 주인공은, 부잣집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숱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결국 결혼에 골인.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팔자가 상대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애간장을 졸이며 드라마를 시청한다. 또 다른 소재로는 주인공의 출생 비밀이다. 출생에 대해 전혀 의심 없이 평생을 살아온 주인공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친부모의 존재와 자신의 출생의 얽힌 비밀을 알게 된다. 결국, 또 팔자에 대한 얘기다. 왜 이렇게 대한민국 드라마의 소재는 팔자에 집착하는 것일까.  



ⓒ국립창극단 인스타그램


팔자 [명사] 사람의 한평생의 운수 

나는 <흥보씨>에서도 그 원형을 발견했다. 민족적 은어처럼 다른 언어로는 감히 완벽히 대체될 수 없는 그 강렬한 ‘팔자’에 대한 인상이 참 오래되고 묵은 것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아마도 팔자는 우리 문화에 깊게 뿌리내린 가족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효, 인생을 겸허히 살아가는 겸손 등으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인의 숙명이나 굴레 따위인지도 모르는 그놈의 ‘팔자’에 대한 이야기, 흥부와 흥보씨.  


그 시절 18세 어린 소녀는 70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정 씨는 남성의 폭력에 의해 쫓겨났다. 오늘날의 눈에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지만, 사실 팔자라는 프레임 속에서 자라온 우리 민족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서러워도 감내해야 했고, 속이 미어져도 ‘이게 내 팔자려니’ 그 마음을 못내 감추었다. 지독한 신분제와 계급 간의 경계가 뚜렷했던 그 시절,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 억울하고 서러운 걸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바로 그것. 우리 민족은 혁명 대신 복종을 택했다. 그저 울분의 감정을 삭이며 가랑가랑 노래하는 것으로 그 마음을 달랠 뿐. 한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천천히 서리고, 또 차갑게 서려왔으리라.  


2017년, 다시 돌아온 <흥보씨>를 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계급도, 차별도 없어졌다고 주창하는 오늘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리 천장 아래서 날마다 매일을 고군분투한다.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약자다.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는 일은 비상식적인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은 차별과 혐오 속에서 살아간다. 열심히 일궈낸 쌀을 그대로 바쳐야 하는 소작농의 삶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내일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곳에서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여전히 슬픈 한의 역사는, 여전한 우리의 오늘과 맞닿아있었다.  


ⓒ국립창극단 인스타그램


자네, 흥보가 놀보되고 놀보가 흥보된 사연을 들어볼 텐가?

창극 <흥보씨>는 캐릭터의 비화가 추가되어 풍성함을 높였고, 사람이 된 제비와 외계인도 등장도 있다. 가장 핵심이 될 행운의 박씨는 금은보화 대신 ‘비워야 채워진다’는 정신적 교훈과 가르침을 남기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흥보씨>의 해학적인 장면에 한참을 웃고 또 웃다가, 그 끝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 허하다. 다양한 전환과 재해석에도 팔자에 대한 서사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일까. 노래인지 절규인지 모를 우리의 소리가 무척이나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 선율 사이로, 웃으며 괜찮은 척 슬픔을 털어내려 했던 아픈 민족의 씁쓸한 미소가 배어 나와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착하고 선한 흥보가 떠올라서, 여전히 악하고 못된 놀부가 떠올라서.  


흥보를 바라보는 시각과 설정은 달라졌지만, 흥보씨의 교훈은 여전히 권선징악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착한 자는 복을 받고, 나쁜 자는 벌을 받는다. 그 교훈은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동시에 유일한 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착하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자신의 그 억울한 팔자가 가벼워질 거라는 먼 훗날의 희망 같은 것.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정말 희망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 같은 것. 오늘도 우리는 그 교훈으로 위로를 받고, 또 그 교훈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거짓 없이 열심히 달려온 우리네 팔자도 언젠가는 흥보처럼 복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 우리의 흥보, 우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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