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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r 27. 2019

:: 영화 우상

허상에 허상을 쌓는다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0대들의 우상이 되는 엔터테이너들을 일컬어 '아이돌idol'이라고 표현한다. 게다가 음악 시장의 대부분은 아이돌 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돌을 꿈꾸고, 그렇게 대중 산업은 아이돌을 찍어내는데 몰두한다. 재밌는 점은 아이돌의 어원이 '꼭두각시'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돌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중들의 우상이 되기도, 대중문화의 꼭두각시가 되기도 한다. 이 무언의 약속과 모두가 아는 비밀이 아이돌 산업의 기저에서 조용히 숨을 내쉰다.


이 이중적인 흐름을 더 살펴보자면, 우상은 히브리어로 '엘릴'이다. 엘릴의 어원은 '알'이고, '알'은 아니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우상이란 아무것도 아님, 헛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신처럼 숭배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헛것의 대상, 그게 바로 우상이다. 대중들은 아이돌을 비롯하여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계산된 우상의 이미지를 보며 열광한다. 그리고 표면적인 우상의 모습과 그 우상의 실체적으로 드러난 특성이 왜곡됐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분노한다. 아이돌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사례는 적지 않다. 내가 숭배하겠노라고 택한 우상의 이미지와  우상의 실체 사이에 어긋나는 지점들을 용인할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중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마음으로, 기왕이면 끝까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저마다의 우상을 택한다.


우상의 담론은 비단 이미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로, 신념으로, 사상으로까지 이어진다. 유중식(설경구 분)은 아들에 대한 부성애, 구명회(한석규 분)는 청렴한 정치인의 명예, 천우희(련화 분)는 생존 그 자체를 극도로 열망한다. 이들의 열망은 곧 헛된 우상이 되어 이들을 파멸로 이끈다. 아들을 잃은 중식, 명예가 흔들리는 명회, 오직 생존하고 싶은 련화의 열망은 더 큰 그림자가 되어 그들의 삶을 좀먹기 시작한다. 이러한 우상의 담론은 철학이나 경제학에서 말하는 소외 현상으로도 설명되는데,


*여기서 소외란 인간이 사회적 활동으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등의 산물이 오히려 인간을 강제하고 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 의미다.





영화 <우상>은 한 사고로 얽힌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청렴한 인물로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명회. 하지만 그의 아들 요한은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다. 명회는 아들을 빠르게 자수시키고 사건은 해결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교통사고로 아들 부남을 잃고 절망에 빠진 중식은 사고의 의아함을 발견하고, 이를 파헤치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한다. 사고의 행방을 묻기 위해 부남의 아내 련화를 찾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진다. 세 인물을 둘러싼 은밀한 비밀과 욕망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얽히고설킨 영화 <우상>.





인간에게 소유격의 단어가 생겨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가르고 나누는 일은 본래 태곳적인 본능일까. 영화   인물의 싸움은 자신의 것을 지켜내기 위한 소유욕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련화가 갖고 싶은 것은 국적이다. 경계 위에서 불안하게 살아야만 하는 련화가 생존의 안정을 갖기 위해서는 경계 속에 들어오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서 련화는 투쟁한다. 투쟁하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아이러니가 련화의 삶을 지배한다.





그에 반해 정치인 명회는 명예에 대해 은근한 집착을 보인다. 다급한 아내의 전화보다는 정치계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사고를 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괜찮았냐', '놀라지 않았느냐'고 묻기보다는 그의 범죄 형량을 따지고 자신의 명예가 얼마나 실추될 것인가를 계산한다. 그는 아들의 범죄를 은근히 각색해서라도,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을 도모해서라도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소속된 정당과 지지율로 완성된 그는  어떤 곳보다 경계가 뚜렷한 정치계에서 자신의 경계를 올곧이 지켜내기 위해 물어뜯고, 물어뜯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다시 물어뜯는 싸움을 벌인다.





중식은 부성애에 대해 집착한다. 그는 장애를 앓고 있는 자기 아들의 성적 만족도를 위해 대신 자위를 해주기도 한다. 아들을 위해 중매결혼에 나서는 아버지 중식. 하지만 중식이 진짜 사랑했던 것은 아들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  자체였다. 그는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보이지만, 그 불안은 자신이 구축해온 부성애의 세계가 사라졌다는 으로 초점이 잡힌다. 련화의 아이가 아들의 아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중식은 며느리를 아내로 받아들인다. 제 손자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 그는 자신이 쌓아온 부성애의 경계를 지켜나가기 위해 한 몸을 바쳐 싸운다.





이렇게 영화 <우상> 은 자신의 경계와 소유에 대해 집착하다가 되레 파멸에 빠지는 세 인물의 갈등을 보여준다. 헛된 것들에 집착하다가 그 집착으로 파멸하고 마는 세 사람. 명회의 아들 요한(조병규 분)은 영화 속 두 명의 아빠에게 보란 듯 피식 웃음을 내비친다. 영화 <우상> 이야기 갈등 원인을 가장 먼저 제공한 아들 요한이, 아버지 명회와 아버지 중식을 향해 웃음을 던진다. 그들의 헛된 우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것처럼.




점을 보러 간 중식은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의 목을 날려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목을 날리는 일. 영화 <우상> 허상의 욕망이 허상의 세계를 끊어내려 끊임없이 싸우는 영화다. 다소 어렵고 복잡한 이 개념은, 사실 이 세계의 근본적인 욕망이고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래서 쓸데없이 잔인하다고 평을 받는 장면들은, 모두 그 투쟁을 진지하게 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닭 목을 비틀어 자르고, 목이 잘려서 죽어 가고, 그 잘린 목을 다시 닭이 쪼아 먹는다. 과연 우리는 허상에서부터 자유로울  있을까.  헛된 세계에서 과연 헛됨에 빠지지 않는 지혜를 가질  있을까. 이 모든 일이 헛된 우상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아는 아들 요한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감행한다. 하지만 쉬이 끊을 수 없는 헛된 우상의 반복처럼, 요한의 목은 쉼 없이 비틀리고 돌아가는 잔상이 되어 명회와 관객을 괴롭힌다.





우상이라는 허상은 얼마나 거대하고, 얼마나 많은 삶을 장악하고 있는가. 영화 <우상>의 결말 속 명회는 혀가 달라붙어 말도 할 수 없는 모습이 되었지만, 여전히 박수갈채를 받는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제 안의 우상을 쫓는 동시에 스스로 우상이기도 했던 명회이기에, 그는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살인을 저지르고, 아들이 다치고, 아내와 엄마를 잃고,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제 눈앞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명회는 허상에 허상을 쌓아 보다 단단한 허상을 만든다. 허상이 가득한 세계에서 그는 곧 영원히 찬란할 우상의 머리다.


불편하고 불안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반추할수록 다시 영화의 문법을 읽고 느끼며 곱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진다. 불편하고 불안해서 외면하고 싶은 그 감정들 끝에 놓인 희미한 말들을 제대로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랄까. 불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복잡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이 영화를, 어쩌면 대중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마음으로, 기왕이면 끝까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 문법을 외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뭐 어쩌면 '우상'의 어원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영화일지도 모르겠지만.



+ 그래도 15세 관람가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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