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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r 19. 2019

:: 영화 칠곡 가시나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구글 검색창에 '대한민국 문맹률'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검색 결과 상단에 뜬다. <한국은 '까막눈' 즉 문맹의 상태에 처한 사람이 매우 드문 사회라 알려졌다. 통계에 따르면 사실이다. 1945년 한국인 중 78%가 문맹이었는데, 1958년 조사에서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이렇게 언론에서는 늘 우리나라가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라고 자랑을 했고, 나는 그 부분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이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는.



한국을 놀러온 나의 외국인 친구 중에는 이런 친구가 있었다. 한국의 아이콘이 재밌다며 사인이 그려진 표지판을 만날 때마다 이를 열심히 찍어대던 친구.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구석구석에 놓인 아이콘을 발견할 때마다 무척 신나고 반가운 얼굴이 되곤 했다. 모르는 글자의 신비함보다 아는 그림의 반가움이 더 큰 듯 보였다. 비록 넘어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거나, 길이 미끄럽다고 말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이야기일지언정, 아무것도 읽고 쓸 수 없는 그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소통이 가능한 ‘시원한’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문맹률이 낮다는 것은 곧 문맹인 사람들이 배제된다는, 문맹을 위한 세계가 비좁다는 의미가 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문맹들이 겪어야 할 불편함은 어떨까, 과연 그들을 위한 배려는 어디에 있을까. 나라말을 읽고 쓸 수 없는 국민에게 이들을 고려하지 않는 국가는 그저 거대한 벽이다. 이곳에 분명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불편함은 세상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멀쩡한 두 눈과 입이 있는데도 ‘까막눈'과 '벙어리'가 되어버린 그들은 주눅 든 마음을 애써 속으로 삼켜낼 뿐이다.


최근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책을 읽었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한글 공부를 시작해 시를 쓰기 시작한 순천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을 엮은 책인데, 일곱 명의 할머니들이 쓴 각기 다른 글인데도 전체적인 시의 내용과 감상은 대부분 꽤 비슷하다. 시의 화자는 글을 알 수 없어 서러웠던 지난 시간들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까막눈이나 벙어리로 살아야 했던 누군가의 한이 슬금슬금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고,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보내고, 속으로만 삼켰던 생각들을 살며시 꺼내 놓는다. 멍울지고, 묵혀지고, 썩어갔을 슬프고 서러운 마음들이 서툰 글자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속이 다 시원하다’는 할머니들의 탄성은 분명 ‘환호’의 감정이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 역시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문맹이었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는 이러한 류의 이야기가 책과 영화가 되어 나오는 이유는, 비단 이런 소재가 새롭거나 흥미로워서는 아닐 것이다. 대신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 놓인 은밀한 민족적 유대감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들의 문맹은 단순히 못 배우고 못 살아서가 아니다. 할머니들의 문맹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라의 아픔과 비극이 가닿는다. 100년 전,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과 글, 정신을 탄압했다. 그 시기를 살아온 할머니들은 뒤늦게서야 말과 글을 되찾는다. 나라를 빼앗기고 가족을 잃고 목숨을 앗아간 슬픈 역사의 잔재가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의 일상과 삶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게다.



자신께서 읽고 쓰지 못함은 전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닌데도, 할머니들은 되레 공부하지 못했음을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한다. 어쩌면 현 세대의 비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우연한 역사와 사무치는 일생에 미안해야 할 쪽은 우리인데, 고마운 마음을 담아 위로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할 쪽은 우리인데. 때때로 한 세대에게 그 이전 세대의 역사는 멀게만 느껴질 수 있지만, 세대라는 것의 기간은 고작 30년이다. 모든 특정 세대는 전 세대와 다음 세대와 함께 삶을 살아가기에, 어엿하게 살아 있는 여전한 전 세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가까운 숨결 속에서 과거는 여전히 가까이에 있고, 우리는  슬픈 역사를 위로하고 고마워 해야  의무가, 넘겨 받은 생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 하는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또렷하게 발견한다.



죽음이 낯설기만 한 젊은 세대가 그들의 생을 바라본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 한없이 약해지고 늙어버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렸을 적, 입과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던 우리가, 이제는 그들의 입을 통해 죽음과 작별에 대해 생각한다. 어릴 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까치가 은혜 갚던 시절 등의 이야기를 통해 生의 다양한 방식을 배웠다면, 이제는 주어진 生을 정리하고 작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生의 끝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본다. <칠곡가시나>는 수평적인 구도의 장면을 줄곧 비춘다. 강을 지나는 긴긴 다리와 논두렁을 걷는 할머니들의 장면이 그렇다. 그들이 걸어가는 모든 길들은 스크린의 처음과 끝을 잇고, 영화의 시작과 엔딩을 잇고,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길을 담담하게 이어 나간다. 그렇게 펼쳐진  위에 가시나들과 우리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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