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독서를 시작하면서 많은 저자들이 추천 도서로 제시해 주던 책이며 청소년 권장도서이지만 나는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읽어야 할지 망설였던 책이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았다 빼기를 여러 번 하다 다른 책을 사면서 곁들여 구입을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책장에 꽂아두었고 손이 가질 않았다.
이 책은 16세의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후 뉴욕으로 돌아와 방황하는 시간과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내용이다.
성에 민감하고 여자와의 섹스를 고민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내 청소년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속이고 친구들과 미팅을 갔던 적이 있었다. 조금 불량한 행동을 하는 친구의 주선이었는데 나로서는 살면서 처음으로 하는 일탈이었다.
지금은 웃기지만 학교와 집 밖에는 몰랐던 범생이가 어떻게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체 미팅을 하고 갈 곳이 없던 우리는 유원지로 놀러 갔다.
말이 유원지지 그때는 산 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이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여학생은 등굣길 버스에서 보는 타인이었다.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학교에서 껄렁거리는 친구들의 여학생과의 무용담은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런데 그 경험과 무용담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신기루가 되기는 했다.
책을 읽으며 홀든의 호기심과 스트라드레이터의 무용담을 떠올린 내용이 내 기억을 소환했다.
홀든의 무력함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동생인 앨리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 피비는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싫어한다며 지독히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홀든에게 던진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끝에 죽은 동생인 '앨리'라고 답한다.
홀든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체념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 홀든에게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선생님의 처사와 좋아하는 것을 제외한 일상은 불필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읽는 사람을 이따금 웃겨주는 책이다.
내가 감동하는 책은 다 읽고 나면 그 작가가 친한 친구여서 전화를 걸고 싶을 때 언제나 걸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이 구절은 책 읽기를 권장하는 책의 저자들이 잘 인용하는 것이다.
책을 선택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안목이 어떤 것인지를 저자는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많은 책을 읽고 있지만 저자의 말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것은 얕은 독서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왜 제목을 호밀밭의 파수꾼이라 정했을까 의아했다.
내용 어느 곳에서도 호밀밭과 연관된 배경이나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제목으로 어떤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지 궁금했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호밀밭의 파수꾼이 하는 일은 밭을 망치는 것으로부터 호밀을 지키는 사람이다.
홀든은 동생 피비의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 답을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일을 하고 싶은 것처럼 방황하는 자신을 누군가 잡아 세워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밑바탕에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 이런 경우는 불행히도 드문데 - 단지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가 쉽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더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점이야.
홀든이 그래도 선생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 앤톨리니의 말이다.
선생의 말은 배움이 중요하다는 내용으로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다. 더 나은 사람이고 더 좋은 결과물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의 도리를 모두가 지키며 살 수 없듯이 말이다.
이번 9월부터 학교에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냐고 자꾸만 묻는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야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다.
내가 아들에게 던지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아들은 축구선수를 그만두고 군입대를 했다.
이번 새해 인사로 아들은 다시 축구를 하겠다고 알려왔다.
전역 후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홀든의 말에서 느꼈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삶의 변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믿고 기다리고 응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 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글을 퇴고하는 시점에 아들은 이미 하고 싶었던 축구를 다시 시작했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삶은 우리가 원하는 데로 흐르지 않는다.
변수에 대응하며 자신의 삶을 당차게 살고,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