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몇 해 전 파란을 일으켰던 컬링, 효자 종목으로 불리는 쇼트트랙, 메달 레이스의 출발을 알리는 스피드스케이팅, 그리고 전설로 남은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까지. 4년마다 찾아오는 올림픽 무대에서 선수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선수들에게 올림픽의 한 경기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다. 그 한순간을 위해 4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견디며 자신과 싸워온 결과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과 부상, 슬럼프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간절한 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치열한 노력은 때때로 한순간의 변수 앞에서 무너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오심’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판정이 있었다. 컬링 경기에서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었음에도 심판이 경기를 종료시킨 사건이었다. 비록 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 한 엔드에서 승부를 뒤집을 여지도 있었다. 그 기회가 심판의 선언 한마디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허탈함을 넘어 허무함으로 다가온다. 다행히 예선 경기였지만, 만약 그 한 번의 판정이 본선 진출을 가르는 순간이었다면 선수들의 4년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었을까.
올림픽은 때로 기적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처음으로 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있다. 세계선수권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타도 아니었지만, 마지막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아름답게 퇴장했다. 그를 보며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떠올렸다. 경쟁은 잔혹하지만, 동시에 기적을 허락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쟁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무너질 때, 스포츠는 감동 대신 분노를 남긴다. 2014년 러시아에서 열린 2014 Sochi Winter Olympics에서 김연아는 은메달에 머물렀다. 많은 이들이 편파 판정을 의심했고, 그 논란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결과는 기록으로 남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납득되지 않는 판정’이라는 상처가 함께 남았다.
물론 심판도 인간이다. 실수할 수 있고,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스포츠에는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이 존재한다. 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종목에서 비디오 판독 제도를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비디오 판독 이후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 내려진다. 그럴 때면 심판에 대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아들이 어린 시절 축구를 할 때를 떠올린다. 어린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심판이 공정한 조정자가 아니라 결과를 좌우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아이들의 경기에서조차 공정함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일은 견디기 힘들었다.
심판은 경기를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 규칙을 통해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존재다. 물론 모든 심판이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의 편향과 무책임이 전체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어떤 이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심판을 탓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해 보이는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수많은 시청자가 같은 반칙을 목격했음에도 전혀 다른 판정이 내려질 때,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그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은 본질적으로 냉혹하다. 부상이라는 변수도 있고, 컨디션 난조라는 변수도 있다. 그러나 오심이라는 변수는 더욱 뼈아프다. 노력과 실력을 넘어, 통제할 수 없는 판단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삶 역시 하나의 경쟁이라면, 우리는 수많은 오심과 마주하게 된다. 억울한 평가,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 공정하지 못한 선택들. 그때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완벽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공정하려는 노력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세상. 경쟁의 결과가 실력과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오심은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스포츠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를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