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나른함이 가르쳐 준 삶의 속도

조금 서툴더라도 네 인생을 응원해 /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by 천진의 하루

하루 중 오후가 가까워 오면 마음이 조급해지곤 한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고,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더 속도를 내야 하고 무언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이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과 달리 쏟아지는 졸음과 권태, 그리고 나태함이 급한 마음의 발목을 붙잡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때마다 우유부단하고 의지박약 한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기 바쁘다. 그런 오후를 맞이하면 어찌해야 하는지 길을 잃는 것은 덤이 된다.


그런 오후를 맞는 것이 부담이었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저녁을 맞게 된다는 불안에 젖으면 앞서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크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잘해야 돼, 빨리 쫓아가야 해, 이것저것 할 수 있는 한 많이 해야 해'라며 자신을 몰아치게 된다.


그 몰아침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그것에 기대게 되고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가고 있다고 위안을 삼게 했다. 몰아쳤고 닦달했지만 성과로 얻은 것은 아주 미약했으며, 자신을 망치고 있는 줄 몰랐다.


번아웃을 맞이했다. 열정이 식었고 만사가 무의미하다 생각되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태양을 맞으며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고 눈을 감았다. 의지와 다르게 쉼이 찾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흐르는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질 것을 목표로 삼으라.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 조금 서툴더라도 네 인생을 응원해 [지희 독서회]-

갈팡질팡하며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붙들어 세운 건 책이었다. 번아웃을 이겨 내는 목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위해 읽어 왔던 책 속의 말들이 깨어나며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나를 건져낸 것이다. 너의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를 해내는 것만이 삶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너를 수렁에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조금씩 모아 두었던 책 속의 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것이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가득 채우고 있던 욕심의 옷을 한 꺼풀 벗어내는 일을 시작했다. 두껍게 껴입었던 욕심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상기하려 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나를 멈춰 세운 번아웃은 다르게 보는 시간을 가져다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걸렸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적어 두었던 책 속의 글은 강제로 멈춰진 시간 속에 불꽃을 피워내며 새로운 시각을 깨워준 것이다. 바쁘기만 하고 욕심만 부리던 삶에서 여유를 가져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근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이 해주는 듣기 좋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우쭐하는 단순함이 중요합니다.

쓸데없는 생각에 골몰하기보다는 자신감을 갖고 좀 더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물쭈물 망설이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떤 일이든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죠. 그런 밝고 생산적인 생각의 원동력이 바로 둔감력입니다.

-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속도를 낸다고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누군가 보다 앞서가고 잘나야 하는 것이 좋은 삶도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는 것이 자신에겐 좋은 삶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뿐이다. 남과 비교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이고 잘못된 삶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삶은 정답이 없다고 한다. 누구나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고 상황과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흐르며 리듬도 다른 것이다. 멈춤은 삶의 방향과 생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오후에 찾아오는 나른함과 번아웃은 멈춤이 아니라 삶의 리듬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조금만 느려도 불안했다. 뒤처지는 것 같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지나친 예민함이 삶을 소모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순간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지치게 했다. 그런 나에게 오후의 나른함은 신호를 보내온 것일지 모른다. 조금은 느슨해져도 괜찮다고, 힘을 빼도 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신호를 오랫동안 무시해 왔기에 번아웃에 이르렀던 것이다.


반대로, 그 신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하루가 달라졌다. 이제는 억지로 집중하지 않는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대신 천천히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가볍게 걷고 머리를 비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이상하게도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에는 남지 않았지만 느리게 머무니 기억하게 되었다.


삶은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는 반드시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 오후의 나른함은 그 순간 중 하나다. 나는 이제 그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머문다. 조금 느려진 호흡으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나는 속도를 잃은 것이 아니라 리듬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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