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기분대로 화내고 때리고... 어릴 땐 제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제가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전 한 번도 엄마를 만족시킨 적 없는 아이였어요... 지금도 엄마와 한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밤늦게 혼자 제 방에서 깨어있을 때... 부엌에 있는 칼로 엄마를 찔러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칼을 보면 무서워서 긴장이 돼요. 저 되게 나쁜 인간이죠. 어떻게 딸이 엄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요. 엄마를 이렇게 미워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승희는 늘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집착하는 엄마 사이의 맏딸로 자랐다. 어린 승희는 매일 밤 부모의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 했다. 그녀는 불행하고 외로운 엄마의 한탄과 욕설과 비난을 받아내며 자랐다. 엄마한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승희는 제 것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늘 엄마의 욕구와 감정을 따라 움직이며 살았다.
“저는 어린 시절이 없었어요. 내 것을 가져본 적도 없어요.”
승희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엄마는 행복해지지 않았다. 평생 가정을 외면하고 살았던 아버지는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아직도 엄마 곁에서 엄마의 신세 한탄과 비난을 받아내며 살고 있다.
승희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받으면서도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버리고 부모를 돌보는 착한 사람일까?
자신을 낳고 키워준 엄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엄마와 한 공간에 있는 것 마저 온몸으로 거부하는 나쁜 사람일까?
영선 이야기
“시어머니가 넌더리 나게 미웠어요. 시어머니랑 얼굴 마주치는 것도 싫었어요. 시어머니가 여행을 가면 교통사고가 나서 시어머니가 죽는 상상을 했어요... 저 되게 나쁜 인간이죠...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정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미워하고 나쁜 생각을 해서...”
영선은 결혼 생활 27년간 온 집안을 책임지는 해결사로 살았다.
사직과 이직을 밥 먹듯이 하며 생활비를 주지 않는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무능한 시아버지와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시어머니를 돌보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가족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부모가 있지만 없는 아이였다. 무능한 아버지와 종교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엄마의 맏딸이었던 영선은 고아처럼 자랐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녀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부모를 영영 떠나보낼 때 어떤 감정이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혼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살아온 대로 몸에 밴 대로 세상의 관습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영선은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가여운 아이로 자라서 무책임한 남편 대신 가족을 책임지고 시부모를 돌보며 살아가는 그녀는 착한 사람일까?
시어머니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감추고 시어머니가 죽는 상상을 하면서 지독하게 미워한 그녀는 나쁜 사람일까?
해원 이야기
“..... 이 말을 하면 선생님이 절 이상하게 볼까 봐 겁이 나요... 그래서 말하지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제가 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안의 분노와 증오가 너무 무서워요. 이 감정들이 저를 잡아먹을것 같아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어요.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어요...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필요한 작은 아이였는데...”
나는 아버지 흉내를 내며 자랐다. 그를 닮고 싶었고 그를 존경한다고 믿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고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품고 살았던 아버지는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늘 내 곁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이 세상의 전부인 어린아이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였던 나의 무의식은 나를 버리고 간 엄마 대신 아버지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감정을 돌보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이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버림받은 아이를 버리지 않고 거두어 준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그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여자의 딸인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웠다.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어 공부를 했다.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착하고 반듯한 아이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였다. 나는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집착을 고스란히 지닌 채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살기 위해 찾아간 상담실에서 나의 내면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분노와 깊은 증오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당혹감과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었다. 고마운 아버지에게 이런 몹쓸 감정을 느끼는 나를 누구도 모르게 숨기고 싶었다. 사실 나는 나쁜 인간이었던 거다. 나는 은혜도 모르는 패륜아였다.
나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일찍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의 욕구와 감정과는 단절되어 반듯하고 착한 아이인척 하며 살았던 나는 진짜 착한 사람일까?
엄마 없는 나를 키워준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는커녕 제 행복을 찾겠다고 과거의 상처를 들추어내고, 죽이고 싶을 만큼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세상에 떠들고 다니는 나는 나쁜 사람일까?
painted by Haewon
죽이고 싶을 만큼 아버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엄마를 미워한 나와 그녀들은 죄인일까?
세상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분노와 증오를 느끼면 나쁜 사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