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습하고 끈적거리는 검정의 선을 따라 익숙한 듯 낯선 존재가 도화지 위에 되살아났다. 그것은 원귀冤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가리고 손도 발도 없이 길고 흰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둥둥 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나를 바라보는 손도, 땅을 딛고 함께 걸을 수 있는 발도 없이 그녀가 돌아왔다. 돌아온 엄마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임이 분명했지만 엄마가 아니었다. 눈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 낯선 존재는 오래전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흔적 같은 것이었다.
-저서 '엄마 나의 엄마 부디 잘 가요' 중에서 발췌
상담실에서 난생처음 내 손으로 그린 엄마는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30대 후반의 어른이었고, 엄마와 헤어진 사건은 수 십 년 전에 흘러가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처 많은 과거에 발목이 잡혀 매일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자궁 속에서부터 내 몸 깊숙이 새겨진 수치심과 불안, 우울과 무기력은 내가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
과거는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흔히 ‘상처’라고 부르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 당신에게 ‘그 상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 상처를 가져와 내게 보여 달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억울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 상처는 여전히 생생하게 고통받고 있는 현재형이지만 그 상황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상처는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유령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남들 손에는 만져지지 않지만 나는 생생하게 몸으로 보고 듣고 느낀다. 나의 상처투성이의 과거는 잡히지 않는 유령처럼 내 안에 살아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하더라도 몸을 움츠리게 하는 서늘한 공기처럼, 온몸이 오싹한 두려움처럼, 삶을 살아야 할 나의 몸이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불안처럼 상처는 내 삶을 지배한다.
엄마는 왜 유령이 되어 내게 돌아왔을까
나는 늘 불안했다. 거대한 정굴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어린 짐승처럼 언제나 겁에 질려 있었다. 그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털을 잔뜩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강한 척했다. 나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무력하고 공허했으며,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몸에 가둬버린 슬픔은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밤낮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내 몸은 그런 긴장되고 불편한 느낌과 감정에 절어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에 나는 내가 환영받을 수 없는 기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불행과 불편함이 너무 익숙해서 그런 삶을 그저 견디어내며 살뿐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상처를 인정하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초라한 버려진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머리를 땅 속에 파묻는 타조처럼 감추고 잊어버리고 묻어버리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더 철저하게 상처로부터 도망치고 억압하고 외면하며 살았다.
수 십 년 동안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몸의 느낌과 감정들은 내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이었던 엄마의 부재와 연결되지 못했다. 통제할 수 없는 만성적인 고통과 괴로움은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이유와 연결되고 정의되었다.
반복되고 지속되는 수치심, 불안, 무기력, 우울은 마치 내 몸과 분리할 수 없는 장기처럼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안의 엄마가 이런 모습이었다면 그동안 정말 힘드셨겠어요.”
내 그림을 본 상담사의 말에 내 몸속에서 수 십 년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 하나가 ‘탁’ 소리를 내며 풀려나간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를, 내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넘어진 자리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고통이 목까지 차올라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나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땅 속에서 머리를 꺼내야 할 시간이었다.
가장 떠올리기 싫고 가장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가 증언하지 않으면 남들은 모르는 유령 같은 상처를 끌어내어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 한다.
억압되고 숨겨진 상처는 당신의 내면에 유령처럼 구멍을 남긴다.
보고 싶지 않아 텅 빈 채로 버려두고 묻어두었지만, 상처는 몸과 무의식에 서식하며 끊임없이 당신을 뒤흔들 것이다. 어둡고 외로운 밤이면 나타나는 유령처럼.
내 이야기가 되는 '아랑' 이야기
경상남도 밀양에는 ‘아랑’이라는 여인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밀양 부사의 딸이었던 아랑은 그녀의 유모와 짜고 아랑을 꾀어내어 겁탈하려던 관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관노에 의해 어딘가에 숨겨졌고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아끼던 딸을 잃은 밀양부사는 관직을 내려놓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 후 새로 밀양 부사로 부임한 이들이 첫날밤에 귀신을 보고 놀라 죽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밀양 부사는 모두가 회피하는 자리가 되었다. 결국 한 용기 있는 자가 자원을 해서 내려와 첫 날밤을 맞이하게 된다.
밤이 깊어지자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꺼지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피투성이의 여인이 신임 부사 앞에 나타났다. 그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왜 자꾸 나타나는지를 물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그리 처연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는 그녀의 한 맺힌 사연을 들어야만 했다.
아랑은 부사의 용기와 태도에 안도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소상히 털어놓고 원수를 갚아 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신임부사는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관노들을 모두 집합시켰고 아랑은 흰나비가 되어 자신을 해친 자의 패랭이에 날아와 앉는다. 부사는 범인을 취조하여 영남루 대밭에서 아랑의 시신을 찾아내어 잘 묻어주고 범인에게 죄 값을 치르게 한다.
이 후로 귀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신임 부사의 연이은 죽음도 끝이 났으며 백성들의 공포와 불안도 사라졌다.
‘상처’라는 유령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아랑의 전설 속에는 유령처럼 내 안을 맴돌며 내 삶을 흔드는 상처를 다루는 방법이 담겨있다.
*우리는 귀신을 보고 죽어나간 신임부사들처럼 상처를 직면하는 공포 때문에 상처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도망치게 된다. 그들은 산발한 피투성이의 귀신을 보았을 뿐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지닌 ‘아랑’을 만나지는 못했다. 우리도 상처로 인해 고통을 겪는 나의 느낌과 감정에 압도되어 고통의 본질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밀양부사를 자원한 용기 있는 신임부사처럼, 오래된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태도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안과 수치심이 고정 값이 되어버려 본질로부터 자꾸만 도망치는 몸의 습관을 거스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살아온 대로 살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질문을 금지당했던 아이로 자라 질문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있다면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의 이 고통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유령처럼 공허하고 두렵고 불안한가? 나는 어떤 한을 풀어야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 간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아랑은 당신 내면에서 울고 있는 당신의 상처 입은 어린 시절과 같다. 당신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느라 그 아이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없다. 그때 그 아이가 느꼈을 서러움, 분노, 외로움, 슬픔은 한 번도 이해되고 드러난 적이 없다. 누구도 진심으로 들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둡고 외로운 밤이면 더 가깝게 들리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를 구하러 와 줘. 내가 여기 있어. 내 이야기를 들어줘.
이제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정성을 다해 온몸으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아이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아랑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랑도 부사도 백성들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아랑의 한풀이는 삶이 되고 일상이 되어야 한다. 부사는 아랑의 원대로 시신을 찾아 좋은 곳에 묻어주고 범인에게 죄 값을 치르게 했다.
묶여있는 삶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나의 상처를 드러내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아랑이 내 안에 갇혀 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라면 신임부사는 그 아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지금의 나 자신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신임부사가 아랑에게 물었던 것처럼 당신 내면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물어보라. 너를 이해하기 위한 진심 어린 질문은 너를 향한 나의 깊은 사랑이다.
어린 시절 아이의 욕구와 감정을 외면하는 부모와 사는 것이 너는 어땠니?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어야 했던 그때 너는 어떤 느낌이었니?
엄마가 삶에 지쳐 한숨 쉴 때 네 심정은 어땠니?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 다니던 네 몸은 어떻게 고통스러웠고 네 심정은 어땠니?
집안일을 돕느라 친구들과 놀지 못했던 너의 심정은 어떠했니?
너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는 엄마와 살아가는 너의 심정은 어떠했니?
그 고통스러웠던 느낌과 감정을 이제 내게 말해줄래?
내가 온몸으로 들을게. 네가 그때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뭐니?
그 아이가 온전히 이해받았다고 말할 때까지 묻고 또 묻고 듣고 또 들으라.
정성을 다해 들으라. 온 몸으로 들으라. 그렇게 그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동안 당신은 귀하고 존중받고 보살핌 받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존재가 되어간다.
상처로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어린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그 아이에게 물어보고 그 결핍을 내가 위로하고 채워주어야 그 아이도 나도 해방된다. 안전하지 못했던 아이에게는 안전을 제공해 주고, 배고팠던 아이는 충분히 먹여주고, 놀지 못했던 아이와는 놀아주고, 위로가 필요한 아이에게는 위로를, 존중받지 못했던 아이에게는 가장 귀한 존중을 주는 것이다.
당신 내면에 묻혀있는 과거의 그 아이를 만날 때 비로소 치유와 회복은 시작된다.
어린 시절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했지만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그 아이의 결핍을 어른이 된 당신이 따뜻하고 섬세하게 채워주라. 안심해도 된다. 그 아이는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아이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당신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기다리는 것은 어린 시절의 부모가 아니라 어른이 된 당신이다. 당신과 마주 보고 당신의 따뜻한 눈빛을 받고 당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 아이는 당신이 부모에게 버림받았듯 당신에게 버려진 아이이며 나를 완성하기 위해 채워야 할 잃어버린 나의 조각이다.
그 아이와 눈을 맞추고 그 아이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의 오래된 결핍과 상실을 어른이 된 내가 주체적으로 채워나갈 때, 내 삶을 흔들던 얼굴 없는 유령은 살이 차오르고 뼈대가 생기고 피가 흐르는 삶의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