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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ul 08. 2022

엄마 밟고 일어서기 그리고 나아가기

엄마를 사랑할 수 없는 딸들의 엄마 넘어서기

너의 부모가 물려준 것에서 너는 너의 것을 만들도다. -J. W. Goethe     


프리다 칼로 , <유모와 나(My nurse and I)>,1937



 29년 전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고 나는 혼자 울었다. ‘너도 나처럼 살겠구나. 내 딸로 태어났으니 너도 나처럼 살겠구나. 나 같은 사람이 되겠구나.’ 나는 두려웠고 미안했고 무력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은 처음부터 막막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어디에서도 쉴 수 없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늘 붙어 다녔다. 그 불행한 느낌의 뿌리는 엄마였다. 불러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내 삶의 평온을 빼앗고 나를 수치심 덩어리로 만들었다. 시간을 거슬러 다른 여인에게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엄마로부터 시작된 저주를 끝낼 길은 없어 보였다. 엄마를 버리고 싶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몸은 중력에 끌리듯 엄마를 중심으로 끝없이 돌고 있었다. 버리고 싶은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도 엄마가 되었다.   

  

나의 엄마는 외롭게 태어나 불행하게 살다 갔다. 깊은 우울증과 정신 분열로 스물일곱에 정신병원에 격리되어 12년을 견디고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두 돌 무렵 엄마와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였고 그녀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은 그녀의 광기와 죽음뿐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는 그녀로부터 받은 것들이 내 운명이 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그 두려움과 아주 오랫동안 남몰래 싸우고 있었다. 딸은 엄마가 물려준 공포와 싸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공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인식하고 엄마의 것을 그녀에게 돌려주기 전까지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간절하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을 내 아이들에게는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엄마’는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엄마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좋은 엄마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걸까. 수많은 육아서적을 읽고 기도를 하고 의지를 내어도 언제나 안개 속이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일은 감춰두었던 나의 묵은 상처들을 거울처럼 보는 일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에게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몸에 밴 대로 사랑했고, 그 사랑은 아이들에게 고통이 되었다.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사랑하고 싶은 나의 의지와는 달리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관계의 고통이 매일 이어졌지만 나는 노력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노력하는 만큼 고통도 켜켜이 쌓여갔다. 

     

 죽음은 묻혀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를 꽁꽁 묶어 고통의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과거의 중력에 끌려 내려간 어둠의 밑바닥에서 나는 내 안에 내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엄마였다. 버리고 싶었던 만큼, 잊고 싶었던 만큼, 미워했던 만큼 엄마는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내 몸은 죽거나 미칠 것 같은 고통으로 가득 찼고, 나는 살기 위해 고통을 토해내야만 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엄마인 걸까?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왜 여기에 없는가? 잃어버린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렇게 살다 죽고 싶지는 않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자유롭고 싶어. 죽기 전에 한 순간쯤은 행복하고 싶어. 그 막다른 곳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않기 위해, 난생처음 나의 내면으로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이제 20년을 걸어온 길 끝에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비에 젖고, 눈을 맞고, 바람에 휘어지고, 돌부리에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고, 막다른 길에서 다시 다른 길을 찾으며 걸어왔다. 엄마의 것은 엄마에게 돌려주고 아버지의 것은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남았다. 나는 엄마의 광기와 죽음을 더 이상 겁내지 않으며, 아버지의 규칙도 이제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내 고유한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나만의 언어로 새로운 세상을 지었고, 나의 사랑은 더 이상 빈곤하지 않다. 나는 딸을 바라보며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물려받은 금기와 규칙과 습관을 깨부수며 그 길을 걸었고, 그 길 위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여한 없이 춤추고, 온몸으로 기쁨과 슬픔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딸은 이제 새로운 엄마를 가졌다. 그녀는 나의 생명력과 용기를 물려받았으니 온 몸으로 나를 밟고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만들며 나아갈 것이다.     

 

 물려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면 엄마를 밟고 일어서야만 한다.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엄마이든 이미 내 곁에 없는 엄마이든 모두 밟고 일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엄마를 안고 가지도 말고, 업고 가지도 말고, 어깨에 짊어지고 가지도 말고, 심장에 매달고 가지도 말고, 다만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둘이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각자의 길을 나란히 걷거나, 서로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고유하다. 엄마의 인생을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엄마를 사랑할 수 없는 딸들의 엄마 넘어서기>는 엄마 없이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지만, 이제는 엄마가 고통이 되어버린 딸들에게 바치는 나의 동지애이다. 나는 물려받은 수치심과 고통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한 번도 훼손된 적 없는 온전한 나 자신을 내 안에서 발견하기까지 수많은 만남과 도전과 배움과 연습과 훈련의 과정을 지나왔다. 

 이것은 그 길에서 만난 딸들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이다. 고통 속에서 ‘엄마’라는 중력을 거스르며 자유를 향해 걷고 있는 딸들의 손에 건네는 작은 응원의 편지이다.  

   

*후성 유전학 epigenetics에 의하면 우리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지만 우리의 새로운 경험이 물려받은 유전자를 억제하기도 하고 발현하기도 한다.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은 불가항력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이 유전자의 불을 켤 수도 있고 끌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유전자는 태아 시절 자궁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서도 발현되거나 억제되며, 조상들의 경험으로 형성된 유전자가 우리의 유전자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려받은 상처와 고통을 물려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용기와 사랑을 물려줄 수도 있다. 나의 선택에 따라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의 창조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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