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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 Jan 11. 2019

환하게 웃는 날도, 그리고 그렇지 못한 날에도

외할머니의 냄새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뒷목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 왜 이러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뒤로 젖히며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보려 했지만 목 주위가 뻐근한 것이 너무 욱신거렸다. 고개를 숙일 수도 옆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 잠을 잘못 잤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마음 한구석에서 덜컥!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목디스크가 온 건 아닐까?’


 새삼 이제 나도 건강에 꽤 신경을 쓰는 나이가 되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해진 마음으로 목 뒷덜미를 조심스레 주물렀다.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목을 달래 가며 조금씩 움직여보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목의 뻐근하고 찌릿한 아픔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결국 방에서 조그만 약통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하얀 파스 두 장을 꺼내어 목 뒤에 정성스레 붙였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파스를 붙인 자리에 톡 쏘는 듯한 시원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이제 조금만 참으면 목의 통증이 말끔히 나을 거라는 안도감도 찾아들었다. 뒷목에 파스를 단단히 붙인 채로 나는 밥을 먹고 잠시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었다. 하지만 아픈 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불안함 마음을 애써 뒤로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목의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어디가 고장이라도 난 건 아닐까? 내일 당장 병원에라도 가야 하나? 그렇게 나의 걱정은 아침보다 더 짙어지고 있었다.

 굳게 믿었던 파스에게서 아무런 덕도 보지 못한 채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실낱같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파스를 꺼내어 붙였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뒷목을 어루만지며 침대에 누웠다. 몸을 뒤척거리자 내 뒷목에 붙인 파스의 시원하고 알싸한 냄새가 어두운 공기 중으로 진하게 스며들었다.


 순간 몇 해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냄새가 떠올랐다.

내 기억 속 외할머니의 얼굴에선 흔한 화장품의 향긋한 로션 냄새가 났고, 외할머니의 손에선 시원하고 화한 안티푸라민의 냄새가 났으며, 외할머니의 옷에선 속이 불편할 때마다 자주 드시던 정로환의 냄새가 났다.

그 어느 옛날 늦은 오후 외할머니의 방에서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볼 때면 순간순간 외할머니의 몸에서 풍기던 외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냄새들 중의 하나가 떠올랐다.


 안티푸라민 냄새.

외할머니는 머리맡에 놓아둔 안티푸라민을 수시로 꺼내어서 바르시곤 했다. 모기에 물려 손등이 가렵거나 몸 어느 곳의 관절이 쑤셔올 때마다 안티푸라민의 조그맣고 동그란 철제뚜껑을 여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콧잔등 밑에 바르시던 날도 있었다. 내 눈에는 외할머니가 반투명한 담황색의 그 연고를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시는 것만 같았다. 습관처럼 안티푸라민의 뚜껑을 열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어디가 그렇게 아프신 걸까 어린 시절의 나는 늘 궁금했었다.


 계절이 바뀌면 공기도 자신이 품고 있던 냄새를 바꾸어버린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순간 변해버린 온도의 차이보다 어제와는 달라진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이제 여름이 사라져 버렸음을 가장 먼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예전부터 ‘냄새’라는 존재가 순식간에 우리를 과거의 추억이나 혹은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바람에 묻어온 천리향의 냄새를 맡고선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토요일 오후, 고등학교의 정문을 나서는 나의 옛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짧은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 같음을 느꼈으니까.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졌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방은 지금 내가 쓰고 있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처럼 주변이 어두웠지만 그때 그 시절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그 시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음이 이상했다. 외할머니의 냄새를 맡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먹먹하면서도 뭉클한 무언가가 조금씩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코끝이 찡해지며 눈언저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온전히 어두운 색으로만 칠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불을 끄고 누운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아직도 뻐근한 목의 통증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릴 수도 없었다. 어쩐지 내 왼쪽 어깨마저 우직하게 쑤셔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불을 켜지도 않은 채로 익숙하게 파스를 찾아 내 왼쪽 어깨에 더듬거리며 붙인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이상하게도 밤새 잠을 뒤척이게 될 거라는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외할머니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다시 한번 더 외할머니의 냄새를 맡기 위해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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