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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Oct 11. 2019

#6. 카미노는 경쟁이 아니거늘..

다섯 번째 날: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22km

  지난밤 조금 조용히 자고 싶어서 공립 알베르게가 아닌 사설 알베르게에  몸을 뉘었다.  팜플로나 친구의 조부모님 댁에서 홀로 지냈던 조용한 밤들이 단 하루 만의 도미토리 생활로 그리워졌나 보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 마을 초입에 바로 보였던 호텔에 소속된 알베르게에 머무르기로 했다. 숙박비가 11유로로 보통 도미토리 가격의 두 배이지만, 조용한 밤을 원했기에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3인실에 배정된 방에 투숙객은 단 두 명. 미국 처자와 나뿐이다. 

이층 침대 하나, 접이식 침대 하나, 작은 테이블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방이지만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한밤중 볼일 보러 매번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지난날의 도미토리의 삶을 생각하면 호강이다. 
  룸메이트가 여자인 점도 맘에 들었다. 그래서 난 그날 밤은 호젓하고 조용하면서도 평화스럽게 지낼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처참하게 흘러갔다.  


 태국과 미국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나의 룸메이트인 미국 처자는 동서양이 오묘하게 조화된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본인이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듯했다-, 부업으로 인터넷 화상 통화로 영어를 가르쳐봤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많은 학생(혹은 고객)이 한국인이어서 한국에 대해 잘 안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 때문인가 그녀에게는 뭔지 모를 우월감이 가득했는데, 그녀의 그런 보디랭귀지를 난 온몸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교양 있고 품위 있게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나를 그녀의 흑구슬 같은 아름다운 두 눈으로 스캔을 하면서 뭔가 슬쩍 비교하며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사실 어쩜  그녀는 나와 첫 대면부터 미묘하게 내 마음에 금을 내었기에 난 뭔가 그녀를 삐뚤게 보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만난 그녀가 나에게 건넨 말은 내 가방이 겁나 무거워 보인다는 말이었다.
사실 내 가방이 무겁다. 싸구려 침낭 자체도 무겁지만, 그밖에 쓸데없는 물건들도 가득했다. 그러나 나의 배낭의 무게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가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투는 내 가방의 무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의 무게를 책망하는 가르침의 태도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물건들을 가리키며 자기 것은 저것이 전부라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냐며 마치 해탈의 도인 인양 말을 했다. 그녀의 물건들- 몇 가지 옷가지와 속옷-은 그 작은방의 옷걸이와 작고 유일한 테이블에 잔뜩 걸려있어서 내 물건을 올려놓을 자리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타인의 배려 따윈 없는 주인을 닮은 속옷들이 위풍당당 옷걸이에 걸려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기분이 상했는데, 그녀가 내뱉는 내 가방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뭔지 모를 벽이 생겼다. 

"난 순례길을 빨리 끝낸다면 모로코에 잠시 들릴 생각이야,  내게 해줄 조언은 없니?"
이전에 두 달간 모로코를 여행했다는 나에게 그녀는 조언을 구했다. 
"글쎄... 무슨 조언이 좋을까?"
"걱정이야."
"뭐가?"
"난 흥정을 할 줄 모르거든, 모로코에 가서 쇼핑을 엄청 할 생각인데  흥정에 약하거든"
"일단, 그들이 부르는 가격의 3분 1부터 흥정을 시작하면 돼, 맘에 안 들면 그 자리를 뜨는 척하면 다시 흥정할 거야"
"난, 자신 없어"
"너 태국에서 살아본 적도 있다며, 거기서는 흥정 안 해봤어?"
"아니, 전혀. 어떻게 그래?! 그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야 그러니 그들이 제시하는 가격에 불만이 없어. 1 달러 깎아서 뭐 하겠어?! 나한테 1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1달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겐 1달러는 한 끼 식사인데?' 혀끝에서 맴도는 그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나를 이해 못할.. 아니 안 할 생각인듯했다. 그러니깐 그녀는 소위 '정답녀'였다.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그저 동의만 해라! 뭐 그런 분위기였다. 
교양 있고 품위 있게 그리고 아주 가진 게 많은 것처럼 말하는 그녀는 나의 무거운 가방부터 배울 마음도 없는 흥정의 기술에 서술하며 우월감을 품어댔다.
그리고, 가끔 나의 길바닥 영어를 완곡하게 정정해 주면서 대화를 계속했기에 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그녀와의 대화에  입을 다물고는 눈에도 안 들어오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 밤새 그녀가 내는 온갖 소음에 밤잠을 설쳤다. 기차 화통 삶아먹는 코골이는 어찌하겠는데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이빨을 가는 소리는 마트의 1+1처럼 콤보로 활약했으며 나중에는 코까지 훌쩍거렸다.
새벽 3시. 알레르기가 도졌는지 두루마리 휴지를 다 쓰도록 코를 풀어 댔는데, 결국 난 몸을 일으켜 괜찮냐고 물었고, 그녀는 약을 방금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다시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그녀의 코 풀이는 계속되었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사람이니깐 인간이니깐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은 이해해줘야 하며, 나 또한 코골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깐..
그렇지만 그녀가 아침에 농담조로 나에게 지난밤 내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말하는 태도에 난 빈정이 확 상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그 꼴이다.

이 좁은 방에 그녀와 있는 것보다, 그냥 공립 알베르게에서 코골이 이웃들과 오손도손 자는 것을 선택했어야 해나보다. '일당백'이라 했던가, 한 명이 만드는 불편한 자리는 백 명이 만드는 소음보다 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왕 그녀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족을 더 달아야겠다.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해서 그녀가 밉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좀 불만이 있는 거뿐이다. 그 후로 그녀를  한 오일 정도 더 마주친 것 같다.  그 첫날 이후로는 그녀와 그다지 긴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냥 마주치면 짧은 안부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했기에 누적된 피로와 오른쪽 무릎 연골을 걱정하느라, 물집으로 만신창이가 된 내 왼발로 인해 현저하게 속도가 떨어진 나를 늦게 출발한  그녀는 늘 추월하며  우월한 눈빛을 보냈었다. 팜플로나에서 시작한 그녀이기에 신선한 향기를 풍기는 그녀는 에너지가 넘쳤고, 자신감과 패기로 가득 차있었다. 

며칠 뒤, 내가 딱 한번, 생살이 터진 왼발 때문에 배낭을 다음 코스로 보낸 적이 있는데, 그날 마주친 그녀의 눈빛은 철저한 우월 덩어리 그 자체였다.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서 배낭을 보낸 것이 죄도 아닌데, 그녀의 말투에는 빈정거림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그런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산토도밍고에서다. 난 9일 차였는데,  나는 체력이 점점 붙는 상태였고, 6일 차인 그녀는 한눈에 봐도 피로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만난 그녀가 울상으로 나에게 건네 말은 
"이제 내 차례인가 봐, 나도 발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어"였다.

그렇다. 시차와 정도를 달리해서 공격이 들어올 뿐 그 누구도 카미노에서 피로와 물집에서 벗어날 수 없나 보다. 
그 후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5박을 했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아마 뒤로 쭉 처진듯하다. 
카미노는 경주도 경쟁도 아니다. 그러니 우월감도 열등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 그 속된 마음을 버리기가 힘들다. 여유 있게 행동하려 하다가도 상대가 발톱을 세우면 나도 모르게 방어태세를 취하게 된다. 
우습게도 마지막 본 그녀의 울상에 내 마음에는  왠지 모를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낫다.







이야기는 다시 화요일 아침으로 돌아가야겠다. 
숙소 옆 바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는 길을 나섰다. 푸에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는 아주 이쁜 마을이었기에 떠나기 아쉽긴 했어도, 앞으로도 연이어 이쁜 마을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길을 계속 걸어갔다.
제주 올레길을 처음으로 만든 이가, 이 카미노 순례길을 걸은 후에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채꽃이 가득한 들판이나, 돌로 된 담장이며, 산새나, 식물들이 제주도의 그것들과 너무 닮아있었다.
  
  가끔, 재미없는 찻길 도로를 걸을 때도 있었지만, 그 지루한 길이 있기에 숲 속 길이 더욱 재미있다는 기쁨의 깨달음을 가진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어느 하나 쉽기만, 혹은 어렵기만 한길은 없다. 
머릿속은 이런 길에 대한 철학들이 가득해도 내 가슴에 이 짓을 한 달 가까이해야만 한다는 지겨움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한국인 아내와 스페인 남편이 운영하는 Lorca의 한 Bar



 지나가는 마을마다 한 번씩 들려 쉬는데, 로르카(Lorca)란 마을에선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뒷 마을에 있던 벨기에서 온 '바트'가 나를 부지런히 따라잡은 탓에 그를 만나 점심을 같이했다.
동양 여자분이 바에서 일하시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에게 한국말로 말을 거시는 보고야 한국 분이 줄 깨달았다. 이태리에서 만난 스페인 남편분과 함께 여름에는 이곳에서 바를 운영하신다고 하셨다.
너무나 맛난 파스타와 무겁지 않은 와인을 한잔했는데, 겨우 5유로만 받으신다. 한국인 디스카운트라고 하신다. 게다 바트의 음식의 가격도 깎아주셨다. 한국 친구 디스카운트라고....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한국 분이 관상을 볼 줄 안다며, 나의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프랑스 파리 사시죠? 그림 관련된 일을 하시고요?" 하며 말을 건넸다.
"아닌데요. 토종 한국인이고, 한국 살아요. 그리고 미술 쪽은 젬병이에요"
"왠지 그럴 것 같이 생겼어요. 그러면 그렇게 살아보세요"
"하하하... 그래 볼까요? 프랑스보다는 스페인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스페인 남자 좋아요. 스페인 남자랑 결혼해서 우리 옆집에 살아요. 한국인 없어 심심해요"
"그래 볼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상황으로는 내 남편보다 스패니시 새아빠를 먼저 찾는 게 빠를 것 같아요. 헤헤" 할배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카미노 길가에서 확률적으로 남편감보다는 새아빠를 찾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점심을 먹고는 걸음이 빠른 바트와 헤어지고는 영국인 토니와 같이 걸었다.
허리와 다리가 불편해진 그의 느린 걸음과 나의 보폭의 속도는 비슷했기에, 혼자 걸으려는 마음을 바꾸고는 그와 함께 에스테야까지 동행했다.
그가 유치한 영국식 아재 개그를 나에게 날리는 것 보니,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다. 
전직 용병이었다는 그와 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예전 중남미를 여행할 적에 벨리즈라는 나라에서 영국 용병들과 같이 어울렸던 기억이 떠올라  이야기를 꺼냈다. 
벨리즈는 정글도 있고,  바다도 있으니 용병 훈련받기 적합한 곳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그의 동료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내가 그의 직업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아님 원래 그의 성격인 거지 모르겠지만, 그는 묻지도 않은 그의 삶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퇴직한 용병이 선택할 수 있는 차기 직업 선택의 폭은 좁다는 것과, 지루한 삶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나름 대화는 잘 통하는 편이었다. 

 "너, 까미노는 처음이니?"
"응,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너는?"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 까미노"
유난히 이날은 카미노가 지긋지긋한 상태였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는 말을 함부로 뱉어냈다.  간사하게도 지금은 세 번째 카미노를 꿈꾸는데 말이다. 

  에스테야의 공립 알베르게까지 동행해서 같이 왔지만, 그 이후로는 그와 부딪히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그야말로 개썅마이웨이였는데, 어느 누구와 몇 시간 이상 붙어 다니려 하려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속박되거나 계획해서 다니려 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만난 그는 나에게 뭔가 후편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난 그냥 내 볼일을 봤을 뿐이다. 그가 싫고 좋고 가 아니라, 그때 나의 상태는 누구와도 오래 정 붙이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다.  



오늘 저녁은 손수 만든 스테이크





 숙소에서 샤워와 빨래를 하고는 지도 한 장 받아 에스테야 동네를 구경했다. '별'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인가 마을은 정말 이쁘고 아늑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유난히 중동계와 인도계 사람들의 주민들이 눈에 띈다는 게 이 마을의 특색이다.
마을 구경을 하고는 슈퍼에서 장을 봐서는 저녁을 해 먹었다. 
왠지 건강하고 든든한 음식을 먹고 싶어서 해 먹었는데, 이날 이후로는 게으름이 넘쳐나서 요리를 해 먹지는 않았다. 바스크 친구들이 나바라 지역을 벗어나기 전에 마셔보라고 추천해준 로제 와인 로사도(Rosado)를 한 병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비된 식사 양이 너무 많은 듯해서 옆에 앉은 한국인 총각과 나누어먹고는 주변 순례자들과 오소 독소 한 대화를 해나갔다.
팜플로나에서 안면을 튼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알게 된 뉴페이스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 하고나 친해질 수 있지만, 어떤 누구와도 깊게 정을 나누지 않으니라 다짐했기에 그냥저냥 영혼 없는 대화만 오고 같다.
순례길이 끝나고 난 지금, 그때, 그 순간 그 공간에 나와 같이 있던 알베르게의  순례자들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들이 되었는지 알았더라면, 난  그때, 그  순간,  그들과 더 깊게 마음을 나누었을 텐데....
순례길이 끝난 지금, 순례길에서 가장 돌이키고 싶은 순간, 가장 바꾸고 싶은 것은 그때 나의 차가웠던 마음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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