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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Jul 31. 2019

#1. 길을 나서며

긴 걸음을 시작하기 전에...

@팜플로나(Pamplona)의 이른 아침

'끼익~' 숙소 건물의 현관문을 걸어 잠그며  집 열쇠를 잘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국의 디지털 도어록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해외 숙소에서 건네주는 두세 개의 열쇠 꾸러미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지만, 열쇠를 통해 '내 공간이 있다'는 소유를 확인 받는 이 아날로그 방식에 역으로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숙소는 팜플로나 토박이 친구인 페르민이 마련해준 곳이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를 여행할 당시 알게 되어서 동행했던 친구인데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하자 그가 거침없이 배려를 내게 베풀어 준것이다.  그의 돌아가신 조부모님이 쓰시던 집이 매매를 위해 비어있으니 부담 없이 쓰라며 그러게 나의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그렇게 그 집이 나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매매와 임대는 빈집인 상태로 이루어진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길을 나섰다. 지난밤 비가 살짝 와서인지 수분을 가득 머금은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과 같이 길을 나서니 현지인이 된듯한 따뜻한 설렘으로 걸음이 가벼워졌다.

 

  셀렘반 두려움 반을 가지고 기분 좋게 시작한 이날의 상쾌함은 팜플로나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처참하게 부서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프랑스길은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 근처의 마을인 생장 피에 드 포르 (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되고. 출발점인 그 마을까지는 팜플로나에서 버스로 쉽게 갈 수 있다. 

그. 런. 데, 

  아침 8시 30분에 있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도착한 터미널에는 아무도 없고 공허함만 가득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비수기인 지금은 생장행 버스가 하루에 한대, 오후 2시 반에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 그  버스스케쥴을 모르는 것은 아니였다.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비성수기인 지금은 버스가 하루에 한대밖에 없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페르민이 배려를 해준다며 이것저것 알아봐 주었고 그가 알려준 정보가 바로 아침에도 버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스크 지방 특유의 악센트 때문인지 뭔가 늘 혼내는 말투를 가진 그의 주장에 '현지인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가 보지, 그럼 일찍 가서 그곳 관광이나 해야겠다'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짤래짤래 길을 나선 것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터미널 근처를 총 맞은 기러기마냥 퍼드덕거리며 배회하는 호사(?)를 누렸다. 


생각해보니, 나의 첫 순례길은 그렇게 첫날부터 미묘하게 뒤틀렸고, 그것은 그 길 내내 그렇게 마음대로 잘 풀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던 것 같았다.


 

 

  

팜플로나 버스터미널


 오후 2시쯤 다시 찾아간 팜플로나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가득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등산복과 등산화 그리고 다부지게 배낭을 둘러멘 다국적의 사람들을 보니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제시간에 도착한 생장피에드포르행 버스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니, 질서 정연하게 사람들이 올라탔고 다시 미끄러지듯 목적지를 향해 출발을 했다.

  버스 안은 이국적인 정서와 다국적의 언어로 가득했다.  스페인식 스페인어가 대부분이지만 그중엔 이태리 말도 미국식, 영국식 영어도 간간히 섞여있다. 무슨 말들이 그리 오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내뿜는 공기는 묘하게 비슷했다. 소풍을 나온 유치원 꼬맹이들처럼 다들 설렘에 들뜬 공기라고나 할까?  그 분위기 탓인지 내 마음속 걱정과 망설임이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800km를 걷기만 한다고?

내가 주변인들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간단한 브리핑을 했을 때 다들 반문했던 질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대략 400km라고 하니 800km라면 서울과 부산을 왕복으로 걷는 셈이다. 한 달 넘게 걷는 것도 걷는 거지만 한국이 아닌 스페인, 그 먼 나라까지 가서 걷기만 하겠다니 당시 순례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주변인들은 당시엔 나를 별종으로 취급했었다.

(요즘은 대중매체에서 많이 다루어지다 보니 많은 이들의 버킷리스트에 등록되었지만...)     

 나도 예전엔 그랬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배낭여행을 즐겨 다닌 터에 이리저리 여행정보를 다양한 루트로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 다른 배낭여행객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순례길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그 돈과 그 시간이라면 다른 곳에 투자하겠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생각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니 그 막연한 도전을 이젠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그렇게 그 막연한 정보를 의지로 바꾸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의지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직이나 휴학 등의 이유로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순례길을 떠나지만, 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서 순례길을 나섰다.  그냥 막연하게 순례길을 걷다 보면 내 미래에, 내 장래에 밝은 길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헛된 욕심이 지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꼬불꼬불한 능선을 따라 버스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목적지인 생장피에드데포르에 순례자들을 데려다 놓았다. 쨍하고 반짝이는 햇살 때문인지 지난밤 까지도 잔뜩 쫄아서 긴장한 내 마음에도 기운이 돋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오면서 본 피레네 산맥도 별거 아니겠지라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고 다른 순례자들의 설레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지도도 없는 낯선 동네이지만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 순례 사무실에 가서 안내서와 순례자 여권(끄레덴시알: 이게 있어야 순례자 숙소에서 지낼 수 있다)을 챙기고 숙소를 잡고 나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내일부터 길을 나설 것이고 대부분 같은 루트를 가게 될 것이니 다들 목적지까지 무사 완주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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