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 녀석 성휘 Sep 14. 2019

#2. 첫걸음, 생각이란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게

생장드피에드데포르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생각이란,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날이다.
지난밤 묵었던 알베르게 55에서의 첫날밤은 나름 괜찮았다.
평소에도 여행 중에는 도미토리에서 많이 지냈기에 삐걱거리는 간이침대라던가 많은 사람들과의 혼숙에는 적응이 꽤 된 상태였다. 그래도 뭔가 다른 여행과의 차이점을 찾자면  까미노 길의 순례자들의 연령이 다양하다는 것과 특히나 어르신 뻘의 순례자들이 많아  평균 연령이 확 올라갔다는 특색은 있었다.

내 옆 침대에 KFC의 캐릭터처럼 생긴 유럽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홈그라운드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방귀를 밤새 뀌시는데, 그 소리가 아주 대범하고 우렁차다. 아마 유럽 대륙의 기상을 몸소 보여주시는 듯하다. 나도 질세라 몇 번 대응을 했지만,
"뾰~~ 용"
왜 이리 애절한 소리가 나는가! 아마도 청순가련(ㅋ)한 동양 여인네의 짠내 나는 까미노 순례길의 후달림을  알리는 소리이겠다.
                                              

   이른 아침 다들 분주하게 준비하는 소리에 나도 잠을 깼다. 6시부터 출동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소음을 들으며 침대에서 계속 뒤척이다 겨우 출동준비를 한다.

7시가 넘어서야 동이 터왔고 낯선 길을 어둠과 같이 걷고 싶지 않아 아침식사를 늦장을 부리며 먹었고 또한 잠시 꼼지락거리다 여유 있게 나섰는데 골목 끝 종탑이 7시 반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종소리가 나의 첫출발부터 상쾌하게 만들어 줬다.


알베르게의 조식. 홍차를 대접으로 주신다. 방광 벅차오르는 감동이다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중 가장 힘들다는 첫날의 코스는 생장부터 론세스바야스까지 가는 27킬로미터의 여정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인 기원전, 능수능란한 용병 전술로 유명한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를 타고 넘었다는 산이 이곳 피레네인지 알프스인지 헷갈리지만 여하튼 코끼리 다리를 탑재한 내가 오늘 넘어야 할 난제가 바로 이 피레네다.

피레네를 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가파른 산길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코스가 있고, 산새를 우회해서 가는 평이한 코스가 있다. 보통은 나폴레옹 코스를 넘어가지만 아직 녹지 않는 눈 때문에 나폴레옹 코스는 차단되었다.  따라서 모든 순례자는 우회 코스로 가야 하는데 이게 나에겐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사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주접을 떨다가 미끄러진 탓에 왼쪽 발이 불안하였고, 바로 직전 여행에서 오른쪽 무릎도가니가 가출을 하는 바람에 무릎이 삐끄덕거러 근심이 가득하였는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우회를 하게 되니  내심 쾌재를 부르게 되었다. 잔부상 때문에 순례길의 시작을 아주 여유 있게 걷기로 했는데 어쩜 이런 전초가 나에게 더 큰 부상을 경계하라는 주의를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만의 정적을 기대하며 출발했지만, 마을을 벗어나서면서부터 따봉의 나라 브라질 할아버지에 잡혔다. 어제 순례자 사무실에서 안면을 턴 할아버지인데, 반갑게 인사를 하는 내가 할아버지 맘에 들었는지 은근슬쩍 걸음을 같이하게 된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걷기는 하는 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하는것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게다 내가 자꾸 뒤처지면 할배가 기다려주는데 뭔가 불안하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휘둘리면 안 되는데....

국제할배전담반인 나는 역시나 할아버지들이 좋아하는 타입인가 보다. 한 명이었던 할아버지가 나중에 4명이 되었다. 뭔 인해전술도 아니고, 풍차 돌리기도 아니고 나를 1-2-1 전술을 쓰면서 내 주변을 휘감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 할아버지들이지만 베테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서양 할아버지들이라 내 부실한 체력으로는 감당할 재간이 없다. 
이전에 먼저 순례길을 끝낸 지인이 있었는데 그분은순례길 내내 혼자 걷기를 절실히 원했는데, 내가 막상 그 상황에 부딪히니 그분이 느끼는 감정이 무었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서는 사진을 찍는다고 늦장을 부린 탓에 할아버지들이랑 겨우 헤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혼자 걷는 즐거움을 탐닉할 수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놀멍 쉬멍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만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 목표를 위해 동행은 가급적이면 피하기로 했는데 -동행을 피한다는 것보다  내 스텝을 여유 있게 유지하는 것- 사진 찍는다고 늦장 부리는 제스처는 가장 적당한 변명인듯하다. 

그렇다고 아예 혼자 독수공방 묵언수행을 하며 걸은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스쳐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수다를 떨거나  같이 휴식과 간식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정도가 딱 적당한 친목인것 같았다. 





  첫날의 걸음은 예상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파른 길도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 평이했고 어쩔 수 없이 찻길을  따라 걸을 때가 많았는데 그것은 참 지루한 작업 있었다. 
'이렇게 찻길을 따라 걸어갈 거면 한국에서 국토순례를 할 것 그랬나?'며 살짝 후회도 했다가도 다시 맘을 다잡았다.
 지루한 걸음이 계속될 때쯤  중간에 나타난 마을의 한 바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키니 이제야 좀 피가 도는듯하다. 맥주의 취기로 폭풍 걸음을 하고는 맥주 파워가 사라질 때쯤 숲 속 길 한 모퉁이 볕이 잘 들어오는 곳에 누워 낮잠을 잤다. 역시 낮술  후 낮잠이 제일 꿀맛이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고 있는 미국팀이 있었는데, 처음엔 아버지와 아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말을 섞어보니 부자지간이 아니다.
"내 아내의 계부야" 
마누라의 새아버지라니... 그냥 장인어른도 어려운데, 한번 더 거쳐 장모님의 새 남편이라는 이 복잡한 관계의 가족의 개념이 낯설다. 중간중간 마주친 나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해주는 사위 덕에 난 이 가족 신상정보와 앞으로의 계획을 다 알게 되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이 순례길을 걷는다. 대부분 혼자 온 사람들도 많지만,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같이 온 사람들도 많다. 다양한 조합들 속에서 내가 첫날부터 만난 가장 특이한 조합의 팀이다.
따로 걷다가도 늦게 뒤쳐져오는 장인을 기다려주는 묵묵히 기다려주는 그 사위를 보면서 가족이라는 것이 꼭 핏줄로 연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천천히 놀며 쉬며 수다 떨며 걸은 탓에 5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숙소인 알베르게는 달랑하나, 따른 대안이 없지만,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라 시설은 완벽했다. 

숙소에서는 다들 첫날 폭픙걸음때문에 순례자들의 곡소리로 가득했는데, 앓는 소리와 함께 후들후들 거리는 몸뚱이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뭔가 모를 동지애가 느껴졌다. 


 샤워를 끝내고는 저녁은 순례자를 위한 메뉴로 사 먹기로 했다. 식당에 가니 랜덤 하게 자리를 배정해준다. 나를 반겨주는 브라질 따봉 할아버지들과  독일 총각과 한 테이블을 앉게 되었는데 따봉 할아버지들의 폭풍 수다는 어색함을 확실히 깨트려줬다. 
우리 테이블은 어찌 다들 술꾼만 모였는지 와인 한 병은 금방 끝내고는 손가락을 빨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금주자만 모여 앉은 옆테블의 새 와인과 우리 테이블의 물을 교환하는 신공을 보여준 독일 총각덕분에 기쁨의 와인이 넘쳐났다. 또한 반대편 테이블의 남은 와인이 내 손에 넘어왔기에 난 거의 한 병을 마셔댔다. 초저녁 잠이 없는 나에게 와인은 수면제와도 같다. 쭉쭉 다 먹고 빨리 자야겠단는 의지에 와인을 원샷을 하고는 성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잠깐 구경하고 잠이 들면서 고된 순례길 첫날을 마감했다. 



첫날부터 나에게 던져지는 다른 순례자들의 질문들과 다른 이들의 수많은 사연을 들으면서 순례길에 대해 사고가 점점 깊어지고 다양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연들을 들고 이 길을 나선다. 누구는 도망 온 것이고, 누구는 일탈을 꿈꾸는 것이고, 누구는 의지를 견주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

여기서 만난 한국 여자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한 커뮤니티카페에서 누군가 질문한 '왜 걷느냐'는 물음에 대부분 사람들이 '그냥'이라고 대답했다며 답답해하셨다. 아무래도 그분은 타인의 모범답안을 찾으려고 하셨나 보다.

'그냥' 
각자의 마음의 추의 무게는 다 다르다. 구구절절 사연도 다 많은데, 자신도 잘 표현하기 힘든 그 감정들과 생각들을 단답식으로 대답하기 제일 쉬운 단어가 바로 '그냥'인 것 같다.
그래도 난 '그냥'대신 다르게 대답할 대안이 있다.
"생각하고 싶어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는 '한 달 동안 걷기만 한다고?, 거기까지 멀리 가서? 그 돈과 시간이면 딴 나라를 실컷 여행하겠다!'라며 관심은 있으나 실천에 옮길 의지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먹고 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문득 나도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기에 온 것이다.


생각이란,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외워둔 누군가의 시처럼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왔다. 
매일 초를 다투며 다양한 정보가 끊임없이 들어오기에 머릿속에는 그 정보들을 정리할 여유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용량이 얼마 안 되는 내 머리에 수많은 생각들과 정보들로 터질 것 같은데, 이것을 걸으면서 잘 정리해볼 생각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지 문제지만 말이다.

생각이란,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모토로 한번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1. 길을 나서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