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선악을 알게 된 그들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 했다고 한다. 선과 악을 알게 된 것과 수치심은 종교적 관점에서 태초부터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선과 악과 수치심. 이것들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 수치심이란 것은 높은 지능이 수반되는 행위이다. 지능이 낮은 사람은 주위에서 아무리 말해줘도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니까. 수치심을 느끼려면 먼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선과 악 어디에 속하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가능한 감정인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 경우에는 수치심이란 감정은 없다. 내가 무슨행동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이 악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다가오는 감정. 수치심. 부끄러움.
나는 성서의 이 부분을 읽으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생각이 난다. 그 작가를 동경하여 그 소설을 성서와 같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설의 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라는 첫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다들 알다시피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했다. 그것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소설과 많은 수필들을 읽고 난 다음 지금 다시 그 문장을 마주해보면 그 사람은 삶을 살아오며 선과 악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살을 계속해서 시도해 온 것은 아닐까.
많은 경우 생은 선이고 사는 악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래야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이 되니까. 가끔 이 명제가 현대 사회의 경제적 관점에서 강요되어지는 사회적 명제는 아닐까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 아마겟돈에서 브루스윌리스의 마지막 선택이 악이 아닌 것처럼. 선로에 떨어진 어린 아이를 구하려 목숨을 던진 청년의 희생이 아름답듯. 독립투사가 결과를 알면서도 일제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일을 해마다 기념하기도 하니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는 가끔 변호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예외가 있는 명제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이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킨 사회적 파장으로만 해석되어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 작가를 좋아하니까.
다자이 오사무는 왜 그렇게 자살하려 했을까. 그 선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보자. 그 결과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수치심을 느끼곤 아담과 이브가 몸을 가린 것처럼 목숨을 끊기로 했다면.
나는 다자이 오사무가 왜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면 내가 가진 삶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술술 풀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그 답을 알아가는 참고서 대용으로 그 사람이 쓴 소설과 수필, 나아가서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까지도 뒤져보는 수순에 이르렀다. 다자이 오사무의 ‘어릿광대의 꽃’이란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 자살시도 후 혼자만 살아남은 다자이 오사무에게 친구들과 형이 병문안을 온다. 그때 그들과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왜 자살하냐는 질문에 ‘살아가는 것이 계속 마이너스이고 죽는 것은 무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오히려 자살하는 것이 손해가 없는 것 아니냐’는 가벼운 반문. 그때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들과 그의 자살방조 혐의를 무마하기 위해 힘쓰는 형 앞에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으리라. 그럼에도 느껴지는 생은 선, 사는 악이란 대명제에 전면으로 반박하고자 하는 의지.
‘이십엔 놓고 꺼져’ 라는 그의 수필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우에노 역으로 가서 어떤 청년에게 이십엔을 강탈한다. 장난이었다며 웃으며 그 돈을 돌려줘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다자이 오사무는 애초부터 즉흥적으로 했던 행동이 아니라며, 한달치 집세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쓴다. ‘이렇게 내 자살은 한 달 미루어졌다.’
돈이 떨어져서 집세도 못 내게 되면 자살한다는 거야? 거기서 돈을 얻지 못했으면 바로 강물에라도 뛰어들었을 거란 말이야? 그럴 힘으로 일을 하면 어떤데? 부유하게 자랐으면서 그 정도 생활고에 죽는다고?
라는 삿대질은 의미 없다. 이미 고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 모두 다자이 오사무가 동의하지 않은 명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또 다자이 오사무가 알려진 것처럼 어린 시절의 여러 사건들과 사랑이 모자란 가정환경, 당시 전시 사회의 풍파에 휘둘려 그런 판단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 지쳐 그로기 상태에 놓인 사람이 쓴 글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나는 왜인지 그 사람이 자꾸만 마음이 쓰이니까.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살 그 정반대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으니까. 생을 향한 갈증. 정말 살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그 사이에 생략된 인간답게. 제대로.
하지만 그럼에도 생의 어떤 순간. 나는 도무지 보통의 사람들처럼 인간답게 제대로 살 수 있지 못할 것이라 자각하게 된다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생을 이어가는 것이 계속해서 마이너스이고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게 진실이란 걸 알게 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까.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측은하고 처절하고 애절하게도 자신의 알몸을 가려야 하지 않을까. 나뭇잎과 가죽옷 대신에 강물에 자신을 숨기기로 한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