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고상한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셨다. 이를테면 예술, 공연, 음악 같은 것이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하게 살아오셨던 삶에서는 그러는 편이 덜 고통스럽고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어떤 영화가 흥행 열풍이 일어 주위 지인들에게 ‘그 영화를 안봤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은 영화가 생기면 의미를 두기 시작하셨다. 보통 소위 말하는 천만영화가 그것들이었다. 나는 혼자 재밌게 본 영화여도 후에 천만영화가 되면 상업성이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는 병이 있다. 대중적인 취향을 공유하는 것은 교양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할아버지와 소의 이야기를 다룬 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도 조금 관심을 보이긴 하셨으나 ‘보고 싶은거면 예매 할까?’ 하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으셨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리 연일 미디어에서 장르를 넘어 한국 영화계 전체에 돌풍을 일으킨다고 광고를 해도 부모님이 독립 다큐멘터리를 보러 가지는 않으시는구나 생각했다. 그건 고상한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어떤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 다큐멘터리가 개봉을 했다. 그 반응은 소와 할아버지 이야기 못지 않게 뜨거웠다. 제목에 있는 글자를 찬찬히 뜯어보기만 해도 어떤 사람은 가슴이 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예고편까지 본 다음 그 영화를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예상된 눈물을 당연히 맞고 싶진 않았다. 아마 영화는 노부부의 움직임처럼 느릿하게 흘러갈 것이고 예고편만으로 어떤 내용인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곤 쉽게 그 영화를 잊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TV를 보며 식탁에 앉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런 영화, 부산에서도 하나?’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고 ‘저런 영화’가 무얼 말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 조금 멈춘 상태로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TV를 보니 거기에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예의 그 다큐멘터리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하죠. 바로 앞에 남포동 가서도 하고 있을걸요?’ 돌이켜보면 나는 그것이 반가웠다. 마치 그런 질의를 기다려온 답변자처럼 술술 영화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보지도 않은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넘겨짚어가며 보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감동적이라고 한다더라, 예전에 히트했던 그 영화보다 평은 사실 더 좋다더라, 영화의 실제 모델이 된 부부 중 할머니는 아직 살아 계시기까지 한데 실제 영화를 본 관람객들이 찾아가는 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더더라. 세탁기를 사러 온 손님에게 상품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 영업사원처럼 나는 아버지가 세탁기를 구매했으면 했다. 대체로 그런 쪽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정을 따랐기에 아버지만 설득이 된다면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관에 갈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나에게 영업되었다.(사실 세탁기가 필요한 사람이니 세탁기를 구매한 것이었겠지만) 나는 부모님이 그런 류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즐기는 교양을, 그리고 그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예매한 영화표를 찾고 커피와 먹을거리를 사서 부모님에게 드렸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이뤄진 가족 밤 산책에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보였다. 반대로 나는 자식을 공원에 데려온 부모처럼 뿌듯했다. 나는 영화를 보며 주기적으로 부모님이 재밌게 보고 있는지 살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동시에 이루어졌으므로 과장을 보태 왼눈으로는 스크린을 오른눈으로는 부모님을 보았다고 해도 된다. 다큐멘터리의 호흡이 길어지고 롱테이크 장면이 나올때면 나는 오른눈을 더 크게 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다큐멘터리에 빨려들 듯 몰입되었다. 과연 입소문이 날 만했다. 독립 다큐멘터리임에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입될만한 내용과 그것을 풀어내는 구성도 은은했고 촬영도 분위기에 맞게 무심하면서도 묵직했다. 스크린에 나오는 저 노부부처럼 언젠가 나의 부모님도 노인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고 상상해도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것들을 공상하며 영화에 집중해가고 있었다.
그 때 였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정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할 즈음, 아마도 할아버지의 죽음이 암시되는 그 때(정확히는 아니다. 그 후에 내가 했던 일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그 장면이 영화 상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후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벨소리가 울렸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휴대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놓지 않은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흔한 종류의 이런 일들은 바로 그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의 벨소리는 마치 영원히 울리기라도 할 것처럼 총 7번의 따르릉 소리를 낸 뒤에야 꺼졌다. 나는 벨소리와 벨소리 사이에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분노와 다시 울리기 시작할 때의 좌절을 합친 스트레스를 느꼈다. 내가 준비한 어떤 쇼에 취객이 난동을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 것과 동시에 옆에 앉은 부모님의 얼굴을 살폈다. 두 분 모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측 전방 어딘가에 몰상식하고 파렴치하면서 멍청하고 배려심이 없으며 무식할 것이며 친구도 몇 없을 것이 분명하고 집안에서도 존중받지 못할 누군가가 앉아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었다. 다큐멘터리 안의 할아버지의 안위에 대해 근심하고 슬퍼하는 동시에 나는 그 우측 전방의 누군가에게 갖가지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다시 영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아직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 다시 꺼내 필히 되짚어 눈치 비슷한 무언가라도 주고 말리라. 좁은 가슴을 품은 채로 스크린에 눈을 붙이려 애썼다. 다큐멘터리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무덤에 찾아온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옷가지를 태우려 하고 있었다. 어떤 마음일까. 넘겨짚을 수도 없는 아득하게 멀기만 한 감정을 상상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옷 중 하나를 작은 몸으로 펄럭이며 못다한 무슨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아까 그 벨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천둥이라도 들은 것처럼 모든 청신경을 빼앗겼다. 아버지는 작은 헛기침을 했다. 나처럼 스크린에 집중된 시선의 목적지를 잃은 것이리라. 영화관에서의 벨소리는 나에게 있어 불결하거나 불가결한 일이었다. 근처에 가 닿기 싫고 무심코 묻기도 싫었던 처음 벨소리가 전자였고 지금 이 두 번째 벨소리는 후자였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상상력을 동원해 두 번째 벨소리에서 어떤 악의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여기 관객 모두를 아니 특히 우리 부모님을, 거기에다 오늘 show의 기획자인 나의 의지를 망치려고 여기 온 것이다. 나는 아까처럼 분노를 뒤로 미루거나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당장 끄거나 밖으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는 하세요.’
나는 아까 특정해 두었던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내가 이 영화관에서 일으키는 소란으로 발생하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한 과녁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더 크게 말했다. 유죄를 확신하는 검사가 형량을 통보하고 자리에 앉는 것처럼 나는 방청객을 돌아봤다. 그러자 피고는 휴대폰을 끄지 않고 허둥지둥하며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채로 영화관을 나갔다. 꼭 받아야 되는 중요한 전화가 있으면 좀 영화를 보러 오지 말아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의 정상참작도 해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맥스에 깨진 집중을 가지고도 다큐멘터리는 감동적이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노부부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고작 두시간 전에 알게 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느껴졌다. 나는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부모님 눈가가 촉촉한 것에 산술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벗어둔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 좌석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따라 아직은 어둑한 영화관 안을 걸어나올 때 다시 종전의 그 벨소리가 울렸다. 출구 바로 앞. 나는 그 영화관의 민중 대표라도 된 듯, 그 사람에게 한 마디를 꼭 던져주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거기엔 출구를 표시하는 초록등의 희미한 불빛도 막아내지 못하는 얼마 남지 않은 엉성한 머리 숱의 백발의 노년의 남자가, 얇은 팔 끝에 낙엽처럼 달린 손에서 쨍쨍하게 울려대고 있는 낯선 기계를 어찌하지 못한 채, 당황으로 범벅이 되어 주름과 구분이 힘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나의 친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도 형이라고 부르셨을 것 같은 그 노년의 남자를 비겁하게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