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써내려가는 행위. 왜 글을 쓰냐냐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아보려 했다. 몇 번을 고민해도 시원스런 답이 나오지 않았고 그 중 몇가지는 나의 세속적인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 말하기 싫었다. 나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런 말이나 쏟아내는 행위, 수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로 인해 어떤 사람의 감응을 일으켜내는 것에서 몇 번의 쾌락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말, 나의 이야기를 전달받을 사람(책으로 치자면 독자)이 정해진 상황에서 새로 가공되어 나온 이야기였기에 나의 의도는 어디선 굴절되고 어떤 부분은 생략되기 일쑤였다. 나는 그것이 조금 아쉽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다. 누군가를 정해놓지 않고 나의 말을, 내 이야기를 던져놓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거인들의 작품들을 접하면 그들의 주변사람이 아니라 다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이청준의 지인이고 자주 술자리를 갖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가 벌레이야기를 집필하기 전이나 집필 중인 상황에서 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요즘은 어떤 소재로 글을 쓰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 사람이 친절히 답을 해준다면. 그리고 하필 말하길 좋아하는 그 사람이 작품으로 나오면 보여줄게, 라고 거절하지 않고 술잔을 쥔 채로 신이난 상태로 그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았다면. 참을성이 깊지 않은 나는 근데 왜 하필이면 자식을 잃은 아내가 종교로 빠져들게 설정한겁니까, 하고 질문을 할 것이고 그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죽었다 깨나도 밀양의 시나리오는 커녕 어떤 창작물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사람에 맞춘 이야기로 늘 변형을 새로 한다. 이야기가 무르익길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서두를 일부러 길게 뺀다. 필요없을만큼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를 말로 이어가고 지치고 지칠 때 즈음 다시 한 번 그 사람의 반응을 살핀 채로 그 다음 내용을 긴급히 궁금해하는 사람에겐 본문을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야, 하고는 앞에 있는 어떤 것이든 마시며 다음 이야기로 넘긴다. 상대가 여성인 경우와 남성인 경우, 그 사람의 나이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순간적으로 종합한 다음 필수적인 가공 후 말을 시작한다. 그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실망감도 주고 싶지 않다는 불안이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찌꺼기가 남는다. 남은 찌꺼기는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붙어있다. 그것이 에너지원이 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썩어가며 악취를 낸다. 결국 나는 그 찌꺼기까지 받아낼 청자를 찾아 만나자고 한 다음 조금 더 지저분하게 가공이 된 상태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거침이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 내 기준엔 그런 사람은 글을 쓰는 형태의 창작행위가 필요없다. 대체로 삶 자체가 예술일 것이다.
나는 그렇기때문에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어떨까. 말은 많고, 그만큼 겁도 많아서.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사람에 맞게 자루에 담아 갈 수 있도록 어딘가에 툭 이야기를 던져놓기위해 글을 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