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의 첫 일기

250129

by 황영수

무언가를 쓰고 창작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 사실 이 다짐들은 의외로 외부보다 내부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생계 유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몹시도 불안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었다. 창작열을 품고 있는 예술가가 현실에 부딪혀 고난을 겪는 로맨틱한 어떤 것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회사를 다닐 때의 소득과 아르바이트를 성실히 했을 때 차이는 미세한 것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남들 눈에 비칠 서른 중반의 나이에 아르바이트만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내가 그동안 외부적인 요소보다 그런 시선들과 불안감을 감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그 원인은 자신의 문제였다. 누군가가 하루키는 어느 날 야구를 보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작가가 되었다는 둥, 그런 유명 작가들의 실사례를 들먹이며 내 용기를 돋운답시고 말할 때면 그때는 이제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이 나는 나의 내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대고 걔들은 하루키고, 오사무고, 톨킨이고, 카뮈고, 나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 아르바이트로 생계만 유지하며 궤도에 이탈한 듯한 삶의 행태를 이어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진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주어진 상황에서도 집필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나의 빈약한 창작력. 어느 날 그것을 마주한 뒤로 다시 궤도에 들어갈 자신도 없으면서 이 길을 그대로 갈 능력도 없다는 좌절의 파도가 나를 덮쳐 오는대도 피할 수도 없는 망연자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겠다면 나는 어떤 이유로 어떤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을 띄어야 할까.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이런 저런 자문을 스스로 던지며 자답을 이어가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책을 가까이 둔 사람이 가지는 분위기와 그로 인해 서서히 근처로 퍼지는 그 지성의 향기를 시샘했을 뿐, 실제로 독서를 하며 기쁨을 느끼거나 하진 못했던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동기의 구체적인 이상향이 있었다. 사실 나는 카뮈와 오사무가 부러웠다. 말 그대로 부러웠다. 그렇게 글을 쓸 능력과 그 고통 속에 놓일 자신은 없으면서 오사무처럼 본인의 살점을 얇게 잘라내듯 글을 쓰며 카뮈와 같은 충격을 세상에 던지고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그야말로 지성인의 집약체로 보일 법한 그런 이데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려 놓았던 것이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완전 허구의 세상을 내가 창조해낼 수 있을까. 몇 번을 물어봐도 자신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이다. 나는 SF 혹은 그저 이야기 자체만으로 빛나는 어떤 구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로 나는 그런 작품을 경계하게 됐다.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써야지. 다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유로,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내가 쓴 책을 읽는 사람도 넓게 보면 나의 삶을 살아보기 위해 그것을 읽는 것일텐데,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 만들어진 이야기를 쓴다면, 그걸 과연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의 문학관이라고 하는 것도 꽤나 비겁하고 치사한 공정을 거쳐 생겨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메리크리스마스> 라는 단편을 읽었다. 만약 이 사람이 영화 감독이었다면 카메라를 어디에 두고 사람을 찍었을까. 나는 이렇게 파멸적인 내면을, 나조차도 가끔은 냄새나서 들추고 싶지 않은 마음 속 음식물 쓰레기통을, 가끔 타의에 의해 열어젖혀져도 인상쓰고 덮기 바빴을 그것을, 어떻게 그 안에 코를 박고 마주할 수 있을까. 작가라면 그런 능력이 있어야할까. 그러니까 나는 나의 바깥으로 끝없이 뻗쳐나가는 이야기를 쓸 동력도 없으면서 동시에 내 안으로 파고들어 잘 벼려진 회칼로 숭겅숭겅 그것을 썰어 내놓으며 보여줄 용기도 없는 것이었다. 거인들의 창작물은 가끔 나를 스스로 파괴하게 만들 때가 있다.

누군가는 수필을 인간 역사의 온상을 하늘에 고하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그것이 수필이 아니라 문학으로 읽혔고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나의 역사도 하늘에 고할 가치는 있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창작의 옷깃만 풀이 죽어 잡고 있으나,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현실적인 꿈을 꾸고 난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