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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Mar 21. 2023

짧게 머물러도 괜찮은 도시란 없다

3년 만의 유럽, 포르투갈에서의 2주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3년 만에 떠나는 유럽 여행지로 포르투갈을 선택한 데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유럽을 몇 번 다녀온 나는 가보지 않은 나라였고, 유럽 초행길인 동행자는 포트와인을 좋아하고, 물가가 싸고, 해수욕으로 유명한 지역이 있고, 무엇보다 역대급으로 비행기표가 저렴했다. 왕복 70만 원 비행기표를 보고 충동적으로 결제했는데 내 인생 유일하게 후회 없는 충동구매였다.


나도 꽤 많은 유럽을 다녀왔다 자부하지만 포르투갈은 좀 특별했는데,

1. 주변에서 포르투갈을 다녀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2. 나라에 대한 이렇다 할 이미지도 없고 (대항해시대 정도..?)

3. 음식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사전지식이 거의 없는 나라라는 것 (포트와인, 에그타르트 외에는 정보가 전무했다)


출국일 직전까지 일 폭탄으로 여행 책 한 장 열어보지 못했고 계획을 열심히 짜는 편도 아니어서 거의 무지한 상태로 출발했다. 간신히 숙소 몇 개만 동선에 따라 예약했는데 항공표가 수화물 미포함인 것조차 공항에 가서 알았을 정도. 이토록 준비성 제로였던 터라 가서도 꽤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무지함 덕분에 여행이 꽤 재밌는 경험이 되었다. 일단 떠나면 어떻게든 살아남게 된다는 확신도 얻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그 특색 없고 맹숭맹숭한 맛이 꽤 오래 남았다.



세상 제일 무뚝뚝하면서도 정 많은 사람들

포르투갈은 내가 가본 어떤 나라보다도 사람들의 성격과 응대가 투박했다. 모든 가게와 길거리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밝게 웃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서비스 정신을 기대하지 않더라도 조금은 당황할 만한 무뚝뚝함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풀리는 순간은 같은 가게를 3번, 5번 갔을 때였다. 영어를 하지 못하던 과일가게 할머니는 세 번째 방문부터 우리에게 오늘 들어온 좋은 과일이 있다는 걸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저녁마다 같은 바에 들렀더니 두 번째 방문부터 바텐더가 쓱 농담을 건넸고, 세 번째 날은 서비스로 포르투갈 전통 술을 받았다.


이탈리아나 그리스 같은 곳은 대부분 첫 방문부터 환대와 농담이 이어진다. 가벼운 우스갯소리와 여행객을 위한 대화로 저녁 테이블이 시작된다. 포르투갈은 대신 스며들듯이 우리를 알아보는 주인장의 눈짓 하나, 툭 던지는 별 것 아닌 농담 하나가 재밌고도 귀하게 다가왔다. 츤데레의 나라였다.


그렇다고 이 나라 사람들이 절대 냉정한 사람들은 아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자주 목격한 여행지도 없었다. 한낮에 웃통 벗고 조깅하던 사람이 자전거와 부딪힐 뻔하자 땀으로 번질번질한 몸으로 자전거를 들이밀며 욕을 해대는 풍경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해 질 녘 숙소 주변을 산책하다가 건장한 젊은이 두 명이 언성을 높이더니 갑자기 한 명이 주먹으로 상대편 얼굴을 '퍽'소리가 나도록 가격하고, 맞은 이가 슬로모션처럼 뒤로 쿵 쓰러지는 것도 봤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꼭 어딘가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곁눈질로 재밌는 구경을 하며 다녔다.


여행하며 읽었던 포르투갈의 문화에 대한 책에, 포르투갈은 외부인에 대한 배척감이 큰 나라라는 설명이 있었다. 오랫동안 한 곳에 살며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나라, 쉽게 외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나라라고. 하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그렇게도 말이 많고 정도 많은 나라라고. 실제로 이 나라 사람들은 말이 진짜 많다. 맛집에서  함께 줄을 선 포르투갈 사람들이 서로 강아지도 칭찬하고 한참을 인생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각자 먹고 떠나더라. 줄 서며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마치 가족처럼 수다를 떠는 나라였다.


요리는 투박하지만 내수 와인은 넘쳐흐르는 나라

유럽을 처음 가보는 동행자는 음식에 대한 엄청난 환상이 있었는데, 솔직히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음식은 사람보다도 더 투박했는데 대부분의 요리가 생선 구이, 생선찜, 해산물 다진 튀김, 고기 스튜 중에 하나였다. 색과 모양이 천차만별인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고 2주간 거의 매일 매 끼니를 유럽식 생선 백반으로 채우고 온 기분이었다.


그나마 에그타르트 NATA가 입을 향기롭게 채워줬지만 그보다 더 자주 먹었던 것은 와인. 포르투갈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와인이 싸고 맛있었다. 달지 않은 화이트와인을 좋아한다면 포르투갈은 천국 같은 나라다. 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행복하게 마실 포트와인부터 싱싱한 그린와인까지 와인에 한해서는 선택지가 화려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서 포르투갈 내에서만 소비하는 내수 와인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 맛보지 못할 처음 보는 와인 라벨들을 고르며 매일이 즐거웠다. 식당에서도 20~30유로에 선택 가능한 보틀 와인이 많고 가게에서는 더더욱 저렴하게 10년 산 포트와인을 마실 수 있다. 덕분에 매일 저녁 식당에서 한 병, 숙소에 와서 또 한 병을 비우며 와인으로 행복하게 절여진 채 여행했다.


그토록 화려한 식민지배 시대의 주인공이었으면서 왜 음식은 이렇게 투박할까 궁금했는데,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 나라 사람들 입맛 자체가 좀 단순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형이라 해산물이 넘쳐날 텐데도 담백한 맛의 대구와 정어리를 그토록 좋아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정어리 특유의 피맛을 싫어하던 나도 2주를 포르투갈에서 보내고 나니 익숙하게 잔뼈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녀온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칠고도 촉촉한  대구찜의 맛이다.


좋다던 포르투도, 별로라던 리스본도 오래 머물러야 보인다


여행 카페와 인스타에서 포르투를 극찬하길래 별 생각없이 우리는 포르투 일주일, 라고스 3일, 리스본 4일로 총 14일의 여정을 정했다. 포르투의 일주일은 넘침 없이 완벽했다. 더 묵을 수 있었다면 미처 가보지 못한 작은 포트와이너리들을 더 가봤을 것이다. 다들 하루 이틀쯤 묵는다는 라고스를 우리는 3일을 묵었지만 그마저 부족해서 수많은 해변 중 몇 곳은 아쉽게 지나쳐와야 했다. 리스본의 4일은 짧디 짧았다. 포르투가 과거 영광의 향수를 담았다면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현재 그 자체였다. 어디에서의 일정을 빼서 리스본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도 고민해 봤지만 답은 없었다. 모든 날이 좋았고, 덜 머물러도 되는 곳은 없었다.


짧게 머물러도 되는 도시란 없다. 같은 골목을 두 번 이상 헤맬 때에야 보이는 작은 얼룩들이 그 여행을 의미 있게 한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허름한 과일 가게에서 할머니가 덤으로 얹어준 복숭아의 맛 같은 것들이다. 수많은 헤맴 끝에 찾은 여러 식당들과, 결국 찾지 못했지만 여정이 즐거웠던 목적지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포르투갈. 다시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즐겼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남는 투박하고도 달콤한 2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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