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머문 자리
우리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게 됐어.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한 말이었다. 지랄발광 사춘기 총량을 채우던 딸도 취업 후 비슷한 말을 했다. 공동체가 확장될수록 비교대상은 늘어난다. 학교사회를 벗어나 직장 공동체로 들어가면 더 많은 비교 시간을 만나고 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자란 환경이 비교 우위였음을 깨달은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비교에 찌든 나는 아이들 말을 내 노력을 알아주었다고 혼자 해석하고 숨죽여 뭉클했다.
딸과 오해가 풀린 마음이 평화롭다.
딸은 외고를 나왔다. 왜 특목고냐고, 왜 자기가 엄마 기준에 맞춰야 하냐고 반발했지만 아주 튕겨 나가지 않은 덕분에 3년 동안 얘를 먹였던 딸도 속이 상했던 나도 합격의 기쁨에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첫 중간고사에서 중간 이하의 성적을 받은 딸에게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합격의 기쁨을 대학까지 이어가려던 부푼 흥분은 단 한차례 시험으로 차갑게 식은 것이다. 나는 아이의 성적에 여과 없는 분노를 터트렸고 내 분노에 놀란 아이는 자신의 분노를 삼켜야 했다. 대신 무시와 외면으로 나를 괴롭혔다. 대학만 들어가 봐, 그동안 받은 설움을 꼭 돌려주고 말 거야. 나는 보복의 칼을 갈며 딸의 무시를 견뎠다. 딸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합격 소식만 들으면 자연스럽게 풀어질 보복 다짐은 시꺼멓게 색을 바꿔 내 마음을 덮쳤다.
지난 3년간의 설움이 솟구치고 감수했던 시간이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겨우 잠들어도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세상모르게 자는 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럴 땐 잠자기를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밤을 새웠다. 뾰족한 묘책을 내놓지 못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실의에 빠진 나는 딸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보복을 실행했다. 말을 섞지 않았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오면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으로 들어가 딸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아이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도 완강히 자리 잡은 미움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창밖을 보니 아이가 느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점을 찍은 아이의 몸무게도 미웠다. 어두운 색 코트를 입은 아이는 한 마리 곰 같았다.
셋째 언니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언니는 스스로 비밀을 깨며 운을 띄웠다. 비밀은 전 남편의 재혼 소식이었다. 전하기 전 뜸을 들였지만 놀랄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이혼 사유에 이미 깔린 전제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소식이 어떻게 언니에게 들어갔는지는 의아했다.
전 남편은 길에서 시간을 보내던 딸에게 자신의 재혼소식을 알렸다. 마치 수능이 끝나기 만을 학수고대했다는 듯 부적절한 시기에 알린 통보. 아이는 충격에 감전된 나머지 자신이 받은 성적 따윈 잊어버렸다. 할 수 있는 건 매일 슬픈 거리를 헤매는 것뿐이었다. 추위와 함께 헤매던 어느 밤, 아이는 외할머니 집으로 간 아이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은 길고 서러웠다. 영문 없이 울기만 하는 손녀를 보는 할머니도, 마침 엄마 집에 있었던 이모도 애가 탔다. 할머니와 이모가 번갈아 다독인 끝에 드디어 딸이 입을 열었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줘. 절대 말하면 안 돼. 엄마가 충격받는 거 나 싫어.
언니가 전한 전말이었다. 엄마에게 투명인간 취급 당하던 시기에 가해진 충격, 무너진 하늘이 내려앉았을 딸의 어깨를 생각하니 내가 한 짓이 끔찍했다. 재우고 내일 보내겠다는 언니의 전화를 받았던 그날, 나는 아이가 없는 집안 공기가 한결 숨 쉴 만하다고 느꼈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엎드려 울었다. 가엾은 내 딸. 전 남편과 나는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어떤 형벌로도 부족할 부모란 사람들의 죄 업이었다. 긴 울음 끝낸 나는 다짐했다. 딸에게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나는 딸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혼했다. 함께 살지만 부재하는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없는 셈 치고 살아보라는 조언이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이혼이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이혼도 남편의 훼방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내 분노는 순식간에 전 남편에게 옮겨 붙었다.
아이의 충격은 심각했다. 대학생이 된 아이가 퇴행 징조를 보였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학급 통솔을 부탁받던 아이, 동성과도 이성과도 격의 없이 잘 지내 리더로 인정받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어느 땐 중3 졸업 시기로 어느 땐 입시를 끝낸 고3 겨울로 정확히 돌아갔다. 아이의 충격은 사춘기 투정과 청년기의 반항으로 반복해서 표출되었다.
엄마는 내 거야. 절대! 네버! 누구 하고도 나눌 수 없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리던 딸은 엄마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내가 속한 모임 구성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빠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었고 엄마도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다.
재혼 생각 없어? 아님 연애라도 해 봐.
혼자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주변에서 별 의미가 담기지 않는 말을 쉽게 던지곤 했다. 딸 앞에서 행여 그 비슷한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고 입단속 하고 다짐받기에 이르렀다. 가정에 불과한 말로 딸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싶지 않았다. 유치해도 퇴행한 아이가 사고할 수 있는 지점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대신 내가 속한 모임에 참여시켰다. 내가 속한 모임이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열릴 때였다. 딸아이가 안고 있는 불안의 원인, 오해의 씨앗을 직접 보여주고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서른 살의 중3, 마흔 살의 고3이 되지 않게 딸의 정서적 성장 물꼬를 터줘야 했다. 그깟 일은 긴 인생에서 한 점에 불과하다고, 딸이 스스로 훌훌 털어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자랄 때까지, 아니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내 업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걸 위해 아이의 감시 안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얼마가 걸릴지 모를 시간을 천천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