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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Jun 19. 2024

난시 검사받으러 갔는데 망막전막 진단을 받았다.

노화는 눈으로부터

전주에 사는 후배 H가 올라왔다. 우린 같은 고등학교 같은 화실에 다닌 사이다. 잠시지만 직장도 겹쳤던 이력이 있다. 첫 직장인 갤러리를 퇴사하며 후임으로 후배를 꽂고 나온 나의 이력이다.

H가 오는 날은 근처에 사는 J도 뭉치는 날이다. H가 전주로 이사 가기 전, 우린 일주일이 멀다 하고 뭉쳤다. 근방에 모여 살 때 언제나 소집종을 울렸던 H. 그런 H가 멀어지면서 우리의 만남 횟수도 급격히 줄었고 지금은 H가 올라올 때만 겨우 뭉친다.


우리 수다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늦은 밤까지 퍼내도 끝내 아쉽게 헤어진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H와 나는 J를 기다리며 서로의 근황을 급히 훑었다. 어치피 J가 합류하면 재탕될 내용들이다. H의 아들은 군대를 갔고 군대에서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를 받았다. 둘은 SNS에서 만난 사이로 여자 친구는 독일 태생이다. 후배 아들이 독일로 한번, 여자친구가 한국으로 한 번, 둘은 장거리 만남을 실현했다. 결혼을 당연시하며 연애를 이어가던 중이라는 사정은 이전 만남에서 들었다. 어린것들의 결혼 전제는 신뢰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흘려들을 수도 없다. 막아서든 길잡이가 되는 부모의 개입이 필요할 때가 있다. H 아들은 연애사 고비마다 엄마에게 자문을 구한다. H는 새엄마다. 오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H는 우리의 간곡한 만류에도 초등학생 둘이 딸린 홀아비와 재혼했다. H는 다시 학부모가 되었고 H의 살뜰한 손길을 받은 아이는 성인이 되었다.


그 남자의 호박덩굴이 된 H의 행보는 여러 면으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H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래서? 아고 저런, 정말? 안 그래도 놀랜 사람한테 왜 그렇게 말한다니. 응응, 그래 알았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곁에서 듣자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결국 J는 합류하지 못했다.


H와 동기인 J는 우리 셋 중 가장 젊어 보인다. 어느 자리에선가 나는 J가 내 딸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겨우 1년 차 선배가 듣기엔 억울한 말이다. 하지만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평생 어깨 단발을 고수하는 J, 새치도 겨우 몇 가닥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 J가 녹내장 진단을 받았단다.


J는 꼬맹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미술과외는 남편이 사업을 크게 말아먹은 20년 전부터 줄곧 해 오던 일이었다. 명문대 출신인 남편은 사업이 망한 이후로 일을 하지 못(안)했다. 일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곧 회복할 거란 말만 주구장천 되뇔 뿐이었다. 그 바람에 생계는 J의 오롯한 차지가 되었다. 근저당 잡힌 아파트 대출금에 아이들 교육비까지 J의 어깨는 가벼울 날이 없었다. 아이들 교육비가 얼추 끝나자 남편이 침샘암에 걸렸다.  


J는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끝없는 돈 걱정과 새롭게 발생된 걱정들이 J의 머릿속에서 뜀발질을 하기 때문이었다. 불황기 예체능 과외는 1순위로 탈락되는 종목이다. 요즘의 경기 침체는 J가 감당할 이자액을 두배로 높였고 수입은 절반으로 줄였다. 그런 마당에 녹내장이라니. 눈의 일탈이 J의 어깨를 더욱 가열하게 짓누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누구나 노화를 겪는다. 그리고 누구나, 가장 먼저 노안을 경험한다. 나는 40대 후반에 노안이 왔다. 노안이 신기했던 나는 선심 쓰듯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명품 선글라스 급 돋보기를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딸의 첫 생리 축하 같은 자족의 이벤트였다.


H와 둘이 저녁을 먹은 후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다시 만날 때도 우린 어제 만난 사람처럼 틈 없이 친밀할 것을 믿는다. 집으로 돌아와 J에게 전화를 했다. 목소리 톤에서. 사이사이 한숨에서, 낮에 H에게 전한 것과 같았을 내용을 통해 그녀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H와 엇비슷한 맞장구와 이런저런 위로를 전했지만 큰 위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원인 제거. 걱정은 원인이 제거돼야 사라지는 감정이니까.




안과에 다녀왔다. 내 눈도 여러 달 전부터 뭐라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불편감이 있었다. 대표적 증상은 돋보기 너머 먼 사물도 흐리게 보인다는 거다. 나는 가끔 내게 다가오는 지인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후배의 녹내장 소식을 들으니 나도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간 김에 백내장과 녹내장 검사는 꼭 받아볼 생각이었다. 원시 안경을 맞춰야 할지 말지는 의사의 자문이 필요했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치니 진료실로 안내되었다. 컴퓨터에 화면에는 붉으죽죽한 눈 사진이 떠 있었다. 못생긴 눈이었다. 왼쪽 눈에 황반 변성이 시작됐네요. 의사가 말했다.


에~ 에! 진단명을 들은 나의 반응이었다.

황반변성에 대해 알아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의사의 말이 만화 대사처럼 들린다. 친정 엄마도 황반 변성이다. 눈이 이상해, 라던 엄마는 어떻게 이상하냐고 붇자 모든 사물이 다 흐리게 보인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된 상태였다. 엄마는 이제 색 구분도 겨우 하신다. 당사자가 아니니 어떤 상태인지 가름할 수 없으면서도 90세가 넘은 엄마에게 어떤 병이 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겼다. 의사는 지금 나도 엄마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한 질병 명은 망막전막이라고 했다. 의사는 짚어주는 마우스를 따라가니 황반의 위치와 하얗게 덮고 있는 막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른쪽 눈과 비교로 두 눈의 차이가 더 명확했다.


노화가 원인이란다. 엄마에게 학습된 완충반응.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노화 is 어딘들. 젠장.


태평성대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나이 들기 전에는 몸을 이루는 각각의 기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특정 부분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서 각각의 위치가 파악된다. 허리삐끗을 두 번이나 경험한 나는 삐끗 이 일어난 위치와 뼈를 붙잡는 근육과의 상호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번엔 눈의 존재를 알아야 할 차례인 거다. 눈곱이 낀 것 같고 속눈썹 사이에 이물질을 제거하려 자꾸 눈썹을 잡아당겼었다. 그러나 이물질은 돋보기를 쓰고 봐도 당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이 더 나빠졌구나 생각했지 황반 변성이라는 단어는 꿈에도 떠올린 적이 없다. 노화는 또 이렇게 태평성대를 무너트린다.


있을 때 잘해. 는 꽤 의미 있는 말이다. 우리는 흔한 말의 명언 가치를 늦게 깨닫는다. 걱정의 위치를 옮기면 무게가 반감된다는 해탈은 지독한 걱정 끝에 얻은 경험이 바탕이다. 가능한 멀리 던져둔 걱정이 나를 평화롭게 한다. 나는 내 눈을 통해 들어온 모든 풍경이 감사하다. 선명하게 보일 때 더 찬찬히 더 오래 보면서 기억에 저장해야겠다. 가고 싶었던 섬 청산도도 더 이상 벼르지 말고 다녀와야겠다.



*녹내장 - 안압상승으로 인한 시신경 손상, 가족력이나 고혈압, 당뇨병, 심혈관 질환 및 근시가 있는 사람에게 발병률이 높다.

*황반변성- 망막 중심부를 황반이라 하고 황반 주위에 일어난 변성을 일컬어 황반 변성이라 한다. 보이는 상에 검은 반점, 굴절,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게 주된 증상이다.

*망막전막- 망막 위에 막이 끼는 질병이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시력이 영구 상실 될 수 있지만 녹내장이나 황반변성과 달리 수술로 치료가 가능하다.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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