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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y 27. 2016

29,900원에 모십니다

김영란법의 허허허虛虛虛





 소 주인은 뿔 두 쪽을 쥐었다. 힘껏 당기고 밀었다. 뿔을 다룸이 지나쳐 소가 바닥에 나자빠졌다. 뿔 두 쪽의 모양과 위치가 본진으로 교정되었대도, 소가 죽으니 그 의미도 무산되었다. 허욕이 부른 허사다. 교각살우다. 김영란법은 사익에 취해 비리의 음주벽을 보이는 공직 사회를 바로 잡겠단 의지의 공표다. 해이한 공직사회를 힘껏 묶고 조이고자 한다. 3만 원, 5만 원, 10만 원의 금액은 교정의 바로미터가 된다. 그러나 법이 품은 야망의 범위가 과한듯하다. 공직사회에 청렴의 물을 들이고자 했던 김영란법의 당초 과녁은 관료였다. 어느새 언론인과 사학 교직원들이 떠밀려 포함되었다. 화살이 내리 꽂힐 과녁의 면적이 늘었다. 관료가 아니어도 과녁 위에 강제 등판된 민간 범위의 이들은 화살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뿔 두 쪽을 쥔 힘이 과해 애먼 소 몸통까지 잡게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관료 비리는 갓난애 울음만큼이나 흔하고 시끄럽다. 국가청렴도는 선진국 모임에서 매번 하위를 길이 보전하고 있다. 100점 만점으로 산출한 청렴도에선 56점을 획득한다. 획득이라기 보단 거저 주어진 점수다.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가 등급쯤. 자녀들이 벌어온 50점엔 천인공노의 모습이면서 그런 어른들이 모여 만든 나라의 청렴 수준은 56점이다. 슬몃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김영란법은 필요하다. 수십억이 까까 사 먹을 돈 마냥 우습게 오가는 세계에 대한 감시는 필요하다. 그러나 언론인과 사학 교직원은 공직의 여집합이다. 즉, 애초 입법 이유에서 벗어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언론인과 사학 교직원이 '공익'의 의무를 지녔대도, 이는 직업 강령으로써 이룩될 성질의 것이지, 법령이 나서서 강요할 대상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의식주에 각종 호사를 덤하여 누리는 관료야 대국민 청렴이 의무로 여겨진다. 기업에 고객이 왕이듯, 관료에겐 국민이 왕인 것이다(현실에서 무정히도 부정당하는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 테두리 밖의 만인은 각자 직업인으로서의 자유를 갖는다. 국민의 감시가 의무가 아닌 자유인에게까지 몇 푼의 식사비와 경조사비를 제한하는 건 쇠뿔 쥐고 목도 죄겠다는 과처사다. 언론과 교육자로서 공익에의 기여는 29,900원짜리 식사와 49,900원짜리 선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 범주에서의 직업의식은 자유롭게 부자유를 익히며 성취된다. 이 과정에 '경조사비 10만원'이 비집을 틈은 없다. 언론과 사학 교직원이 김영란법의 적용 범위에 들어간 이유는 쉽게 말해 업무의 공익성과 비리 연관성 때문이다. 이 말처럼 중립적이며 보편적이고 광범위해 모든 직업의 성격을 포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모든 직업은 일말의 공익성을 갖고 있다. 비리는 사기업 본청과 하청 관계에서도 빈발한다. 철저한 이윤 추구의 장인 사기업 마저도 한구석에 공익의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법조계와 의료계는 또 어떻고. 그렇다면 이렇게 팽창한 직업군 모두를 감시의 시야로 찍어 누를 텐가. 공익 아래 모든 자유를 잡아 가두겠다는 선전포고는 위험하다. 공익의 고귀한 가치에 빌붙어 기준 없는 사법 복종을 강요해선 안된다. 모두가 30,100원짜리 식당 영수증에 쩔쩔매는 모습은 끔찍하다.  




 교공살민 矯公殺民

공직사회 고치려다 민간사회 죽인다. 김영란법의 허를 메우는 길은 적용 대상 범위의 확정에서 시작할 수 있다. 국가에서 녹을 받는 목민관, 딱 여기까지로 추려져야 한다. 애초의 목적에 부합하는 범위 말이다. 수구초심이야 말로 뿔을 고치며 소를 살릴 수 있는 유일의 길이다. 민간은 자유의 밭에서, 공권은 감시의 바다에서 살아야 한다. 해산물과 농산물을 같은 바구니에 넣으면 뭔 맛도 안된다. 개밥도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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