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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y 20. 2016

누구의 법관도 아닌 전관

단지 보험왕일뿐





 야 인마 내가 이 동네 꼿꼿대장이잖냐.

내 싱싱한 척추도 못 당해낸 아버지의 꼿꼿한 자세는 그가 자부하는 동산動産이었다. 그의 직각 선 옆태는 활처럼 구부정했던 내 학창 시절이 꿈꾸던 선이었다. 작년 겨울 아버지는 허리 수술을 받았다. 노후된 척추가 문제라는 건 의학에 일자무식인 나라도 찍어 맞출 수 있는 싱거운 답변이었다. 이는 밥때가 되었으니 배가 고플 것이고 잘 때가 되었으니 졸릴 것이다와 같이 김 빠지는 진단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매일 병원에 갔다. 큰 수술을 처음 앞둔 아버지는 덜 자란 남동생처럼 근심이 많았다. 겁 많은 나는 애써 다 자란 성인 티를 내며 아빠를 다독였다. 내가 껄렁한 오후를 보내는 동안 아버지의 수술은 끝이 났다. 아버진 병원에서 꼬박 스물 한 끼를 더 드시고 퇴원했다. 보름간의 병원비는 어마어마했다. 일 인실도 아니었는데. 치매 보험, 치아 보험, 암 보험 그 하고 많은 보험 중에 실비만 쏙 흘린 엄마 아빠가 미웠다. 내가 대신 내줄 것도 아니면서. 이래서 보험을 드는구나 했다. 죽으라는 법 없대도, 까딱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 보험 때문에.     




 보험을 들렸다. 보험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지의 미래를 보장한다. 제 2의 국민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실비 보험의 경우 가입자만 3천만이다. 실체적 보험은 희부연 미래를 보증한다. 참 건설적인 시스템이다. 사람들은 미래의 불안을 계약서에 가둠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이처럼 보험은 불안 제거를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전관예우도 결국 보험 본능의 발동이다. 전관을 예우함은 자신의 퇴직 인생을 대우함이다. 현직은 퇴직 인사의 판결을 유리한 고지로 이끈다. 현직은 전관의 상승하는 승소율과 감형률에 제 찬란할 미래를 투영한다. '내가 오늘 들어준 손이 훗날의 내 손이 될 것이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전관예우 계약서라는 서면화된 형체만 없다 뿐, 이 나라에서 전관예우의 네 글자는 종이 한쪽보다 형형한 존재가 되었다. 보험 철회는 어렵다.


  보험으로서의 관습화 된 전관예우는 사법의 공고를 흔든다. 실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의 항소 감형률은 70%를 전후한다. 평균 35% 언저리의 일반 변호사 수치와 비교해보면 몸집이 정확히 두 배다. 한 전관 출신 변호사는 1년 수임료만 91억에 달한다. 유독 무고한 피고들이 전관 변호사에게 몰린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전관 변호사니까 이 변호를 맡을 수 있는 거야." 이는 전관의 경험이 현직 변호사의 풋내기 법 지식보다 유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와 벌은 변호사의 혀 마디로 인해 천지가 반전되듯 바뀌지 않는다. 구형하는 판사에 달렸다. 전관의 높은 승소율엔 판사의 뒷백이 전제된다. 전관예우라는 '수익률 높은 보험'에 매료되어 버린 현직들이 전관 수임 사건을 봐주기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의 공고란 형평을 말한다. 형평이 갖춰져야 할 사법은 사라지고 균형 잃은 집행자만 전횡한다. 전관 앞의 사법은 더 이상 죄의 경중을 재지 못한다.



  방지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우리 법엔 <전관예우 방지법>이 있다. 내용은 판검사로 재직했던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법원 및 검찰청 등 국가기관의 사건을 1년 동안 수임할 수 없도록 한다. 역시나 이 내용엔 빈 구석이 있다. 변호사 개업 366일이 되면 유관기관의 사건을 수임해도 된다는 맹점을 갖는다. 이렇듯 법은 1년이란 시간이 갖는 무용성을 대단히 합당한 기준인양 적어 놓았다. 명실이 전혀 상부하지 않는 모습이다. 더구나 법조계는 '처'와 '관'에 칸막이가 없다. 해당 기관 사건 수임을 막는다고 전관에게 흘러갈 새 사건이 마르진 않는다. 국가기관 관련 사건을 떠난 전관은 사기업의 너른 터로 진출한다. 1년이란 유효기간과 접촉 금지 기관의 설정은 이렇듯 전관예우 방지에 전연 힘을 쓰지 못한다. 한마디로 실리 없이 명분만 버젓한 법이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처절하기가 젖 먹던 힘까지 소환할 정도다. 본능이 달리 본능이 아니다. 살겠다고 하는 짓은 동정을 부른다. 발치까지 잠긴 인생의 종막을 거부하며 처참히 버둥댈 적에 말이다. 전관예우는 아니다. 살겠다고 하는 짓이 아니라 벌겠다고 하는 짓이기에 그렇다. 일평생 먹고 마시던 법을 이용해 마지막을 참혹으로 장식해야 할까. 왜 격을 모르고 값만 알까. 그래선 염가의 동정심도 불러낼 수 없다. 법의 형평이 주저앉은 참상에서 과연 누가 법관을 신뢰할 수 있을까. 법조인 미래 보장형 은퇴 보험은 없다. 없어야 한다. 그저 보험이나 꼬박 붓는 것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실비보험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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