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the ungraduated
내 몫으로 떨어질 학사모가 있다. 그러나 학사모가 써질 머리통 둘레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잴 필요는 없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다. 업이야 어떻든 졸의 여부만 중요하다. 그렇게 내 졸업은 유효하다. 실은 입학의 순간, 졸업은 벌써 끼쳐온다. 학점은 졸업을 위해 닦인다. 대부분의 입학은 배움보단 졸업에 의의를 둔다. '아직 다 먹지 않았어'도 식당 이모는 뚝배기를 치우고 행주를 데려와 테이블 위의 찌꺼기를 거둬간다. 우리의 미진함은 참작되지 못한다. 시간은 대충 나를 떠밀고, 버틸 근력이 없는 나는 대학에 담겼던 발을 뺀다. 뽑히듯 빠진다. 나만 그래? 영화 <졸업> (1967)의 벤자민도 그렇다. 유망한 장래를 앞세운 벤자민은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온다. 푸짐한 파티의 이층 집엔 술 보다 질문이 흔하다.
"그래, 앞으로 뭘 할 거니?"
살찐 사재에서 부대끼며 살 것 같은 중년이 묻는다. 벤자민은 계단 들머리에서 어정쩡한 미소로 "위층에 올라갈 건데요."라 답한다. 순진한 척 회피한 질문이 이번엔 정곡을 찾는다. "아니, 너의 장래에 대해서 말이야^^" 벤자민과 나는 동시에 난처했다. 그네들은 자신들의 지나온 과거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미처 오지도 않은 내 미래를 알게 하라니. 갓 소년을 벗은 벤자민에겐 무정견이 정견이다. 그러니 그는 대답 대신 걸음에 살길 구걸하듯 이층으로 달아난다. 이렇듯 벤자민 주변의 어른들은 벤자민에게 미래의 상像을 그려보라 한다. 한 여자만이 벤자민에게 성性을 그려준다. 하지만 관능의 무기로 무장한 그녀(로빈슨 부인)도 자신의 딸(엘레인 로빈슨)과 벤자민의 관계를 알아채고 시기로 달아오른다. 그리곤 곧바로 자기 방어 태세로 전환한다. 벤자민과의 간통을 의심하는 자신의 딸 앞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구멍은 피해자가 되는 길이었다. 벤자민과 로빈슨 간의 합의된 관계는 벤자민 일방의 강압적 짓거리로 둔갑한다. 적어도 그녀만은 세파가 빚은 관능의 덫인 줄 알았는데, 태만 겨우 다린 빈 깡통이었던 것이다.
<졸업>은 보는 이를 노소의 갈등에 등 떠밀지 않는다. 대신 졸업을 하나 마나 '우리는 못난이들'이라 말한다. 오래전 졸업했을 유수의 중년은 버번 달라는 말에 매번 스카치를 따르는 답답이 거나 졸업 후 갖는 여유를 허비로 낮잡는 실용주의자(?)들로 묘사된다. 갓 졸업한 벤자민은 어떻구. 젊음 특유의 청청한 거만과 무례함, 로빈슨과의 찐덕한 약속(내 딸과 만나지 말아줘)을 가볍게 털어버리는 생원으로 나온다. 졸업을 앞둔 엘레나 또한. 어머니와 밀회를 해온 벤자민과 손 잡고 결혼식장을 도망 나온다. 저지하는 제 부모를 치고받으며.
통용어 사전에서 졸업은 끝을 거점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졸업>을 꿰뚫는 "앞으론 무얼 할 거니?"의 질문은 이 전제를 굳힌다. 그렇다면 졸업을 세 번이나 한 교수는? 무고한 대학원생을 한 손으로 들고 나른 인분 교수와 옥시의 유해 성분을 알고도 은폐한 교수, 이젠 내성이 생겨 덜 놀라운 성추행 교수까지. 충분히 '나아간' 그들은 졸업 전 이십 대의 패기만만보다도 퇴보한 모습이다. 학위는 사람을 키우지 않는가 보다. 이력의 탑塔엔 빈 울림이 흔하다. 로빈슨, 벤자민, 엘레나는 다른 얼굴의 우리다. 학사를 마쳤다고 천지가 개벽해 직업이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성인이 지녀야 할 헤아림이나 덕성은 더욱이 학위로 구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졸업卒業의 업業은 학업學業이 아닌 행업行業이다. 학업을 마침은 장편 소설의 1부나 될까. 기껏해야 화요일 퇴근길에 들르는 복권방 정도일까. 토요일 8시 38분은 아직 멀다. 졸업은 그만큼 감감하다. 난판 펼쳐놓은 행동이나 추슬러야 겨우 졸업 요건을 채우려나.
그니까, 조모임 열화도 가시지 않은 졸업생에게 대단한 거 바라지 말아 달라는 졸업을 앞둔 이의 군색한 푸념. 졸업을 할 수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