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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Jun 06. 2016

아가씨

억압적인 세계를 해체하는 두 여성의 관능적인 반란

  


* 스포가 포함돼 있습니다.


 숙희(김태리)는 히데코(김민희)의 하녀로 고용된다. 하녀로서 모습을 갖추고 그녀가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히데코의 집은 여성 억압의 세계를 상징한다. 권위적인 남성인 이모부(조진웅)가 그 집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모부는 자신의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여성들을 억압한다. 이모(문소리)와 히데코의 삶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모는 그 세계를 탈출하려다 이모부에게 자살로 위장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림 한 장으로 그 단서가 제시된다. 문어. 문어가 몸을 휘감고서 한 여인의 성기를 탐하고 있다.  여성을 향한 폭력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선 성적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히데코는 인형을 들고 있다. 그녀가 그 세계의 인형임을 상징한다. 그녀는 그 세계에서 낭송하는 기계로서 훈육받고 교육된다. 히데코는 사람들, 보다 엄밀하게는 남성들 앞에서 특정 책을 낭송하는 인형과 다름 아니다. 낭송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의 구도는 여성을 인형으로 환원하는 듯하다. 카메라에 담긴 여성에게선 어떤 인간적인 느낌도 풍기지 않는다. 시선은 공허하기만 하다. 낭랑한 목소리는 기계음을 듣는 듯하다. 이모부가 구축한 그 세계에서 히데코는 어떤 동화에 등장하는 노래하는 '하프'와 같다. 즉, 주체가 아닌 객체요, 도구다.


 히데코가 낭송하는 책도 여성 억압적인 세계의 한 면을 잘 보여준다. 예술 아닌 외설이다. 책은 음담패설을 담고 있다. 낭송하는 동시에 여성들은 성적인 묘사를 행위로 보여주길 강요당한다. 사람들의 달콤한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확신시켜줄 중요한 삽화가 책에서 뜯겨져 있다. 경매에 나선 남성들은 말한다. "이러면 책의 가치가 떨어지지요." 이모부는 삽화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 히데코로 하여금 직접 그 장면을 연출하게끔 하는 것이다. 남성들 앞에서 책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히데코의 모습을 보면 여성을 억압하는 그 세계의 압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다. 부차적으론 역겨움이 몰려온다.



 구원이 필요하다. 히데코는 이모가 그랬듯 도피를 꿈꾼다. 그런데 그에게 찾아오는 첫 번째 백마 탄 왕자님은 '기만'이다. 구원을 자처하는 백작(하정우)의 관심은 오롯이 '돈'에만 향해 있다. 무엇보다 '여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이모부의 시선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백작은 도구로서 히데코를 바라볼 뿐이다. 백작은 육체를 탐하고자 할 뿐 거기에 어떤 감정도 불어넣지 않는다. 그가 히데코의 옷을 벗기는 건 쾌락을 위해서이지 어떤 진실된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이모부가 인형의 삶을 살 것을 강요했듯 백작 역시 인형으로 살 것을 은연 중에 강요한다. 백작의 구원은 구원이 아닌 기만이다. 백작과의 도피는 또다른 억압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진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인물은 따로 있다. 숙희다. 속고 속이던 중 히데코와 숙희는 서로에게 마음을 품는다. 억압에서 벗어날 해방로를 서로의 몸을 탐하며 발견한다. 숙희가 히데코의 입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그녀가 느낀 성적인 느낌은 억압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감각이었다. 두 여자가 발가 벗은 채 서로의 육체를 더듬을 때 비롯하는 쾌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엔 왜곡된 어떤 권력 관계도 없다. 그것은 순수한 에너지 결정체다. 둘은 서로의 몸을 탐하며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둘은 둘만의 도피를 꿈꾼다. 그녀들이 '억압'으로 얼룩진 음담패설의 책을 물에 쳐넣을 때, '구원'을 가장하여 복속을 종용하는 백작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때 묘한 쾌감이 몰려온다.


 둘은 억압적인 세계에서의 도피에 성공한다. 그곳에서 둘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영화 결말에서 두 사람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은 기존의 세계를 붕괴시키고는 그 위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함을 상징한다. 너무나도 대담하게 둘은 서로의 몸을 탐한다. 관능은 이전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둘은 구슬을 서로의 입에 넣고 또 성기에 넣기도 한다. 이 구슬이 남성이 여성을 억압할 때 사용하는 도구임을 상기해야 한다. 이모부는 이것으로써 히데코를 학대했다. 구슬을 통한 정사는 그녀들이 남성이 구축한 세계에 보내는 조롱이자 그녀들이 행하는 하나의 정화 의식이다. 그녀들이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장면엔 일체의 남성 권력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오로지 그녀들만을 위한 세계다. 막바지 남성의 공고한 세계가 붕괴된 바로 그 자리엔 여성들의 탐미가 구축한 세계가 들어선다. 공교롭게도이 파격적인 장면은 이모부와 백작이 그들이 구축한 그 세계에서 몰락하는 장면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영화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다. 기만(백작)이 판쳤던 시기다. 여성을 향한 폭력(이모부)이 공공연하게 행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은 그 자체만으로 여성이 억압된 세계에 갇혀 있음을 상징한다. 탈출구는 없다. 히데코란 개인으로 묘사되나 그녀가 대변하는 건 남성이 구축한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다. 카메라는 과거로 향하나 사실 그것이 담고 있는 장면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여성이 억압된 세계에 갇혀 인형으로 살길 강요받기는 지금도 매 한가지다. 히데코와 숙희의 관능적인 '반란'을 보며 홀가분함을 느낀 건 비단 나만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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