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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y 28. 2016

오베라는 남자

현대인의 상실감 그리고 관계망

 


 성격 참 괴팍하다. 1+1 상품이다. 낱개로 팔 때와 묶음으로 팔 때의 가격이 다르다. 괴팍한 할아버지인 오베(롤프 라스가드)는 숫자에 따라 물건 가격이 달라진다며 투덜거린다. 애꿎은 판매원을 쏘아붙인다. 이 정도도 약과다. 산책하는 개를 향해선 털을 깎아 양탄자로 만들어 주겠노라 호통친다. 마을에 들어선 자동차를 가로막고선 "당장 빼"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상실감이 원인이다. 오베는 소냐(이다 엥볼)를 잃었다. 가슴엔 공허감이 가득하다. 인생이 엉만진창이 되었다고 느끼는 오베는 세상을 저주한다. 적어도 소냐가 살아 있을 적엔 그렇게 괴팍하지 않았다. 오히려 훈남이었다. 오베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위해 비 오는 날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휠체어 전용 길을 만들 정도로 멋진 남편이었다. 그런 오베가 세상으로부터 "노망난 노인네" 소리를 들을 만큼 괴팍해진 건 소냐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의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해서다. 


 물론, 보편적인 상실감이다. 오베가 경험하는 상실감 말이다. 결코 특수하지 않다.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지 않는 한, 부부가 한날한시에 눈을 감지 않는 한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었을 때의 상실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사랑하는 상대를 먼저 보내고서 쓸쓸하게 일생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굳이 사별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 우리는 엄청난 '상실감'에 직면한다.



 상실감에 직면했을 때 현대인의 대응은 일반적이다. 상실감에 압도되고 마는 것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오베는 상실감에 직면한 순간 자살하는 선택을 한다. 40년 넘게 일한 직장에서 짤린 직후 오베는 엄청난 상실감에 직면한다. 외관상 담담하나 그가 행하는 선택은 천장에 줄을 매달아 목을 거는 일이다. 자동차에 유독가스를 채워넣은 뒤 평안히 눈을 감아보기도 한다. 오베가 보이는 극단적인 선택은 상실감에 직면했을 때 현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상실감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 왜 현대인은 상실감에 압도되고 마는가? 이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한다. '관계' 말이다. 촘촘한 '관계망'은 현대인이 상실감에 대응토록 한다. 상실감이 아무리 허기지더라도 관계만 촘촘하다면 그것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한다. 오베가 상실감에 직면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경험한 건 그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웃은 그를 미친 노친네 취급했다. 자동차 취향 차이로 멀어진 친구와는 단교하다시피했다. 자식은 유산됐다. 즉, 오베에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오베의 인생이 보여주는 건 실상 현대인의 엉망진창이 된 관계망이다. 



 오베는 이전에도 숱한 '상실감'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는데, 그때는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오베는 어머니를 여읜다. 오베는 거기서 찾아온 상실감을 아버지와의 끈끈한 '관계'로 극복한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오베는 그 품에서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느낀다. 오베는 아버지란 존재를 통해 어머니의 빈 자리를 메운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방황하던 오베 앞에 소냐란 여인이 나타난다. 오베는 바로 이 '소냐'란 사랑의 대상을 통해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극복한다. 오베가 더 없이 소냐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녀의 존재가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복원되자 상실감도 극복된다.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한 가족이 거듭 방해한다. 파르바네(바하르 파르스) 가족이 그렇다.  이들의 방해 작업은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오베는 파르바네를 매개로 새로운 이웃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삶에 의지할 만한 대상이 생긴다. 목적 의식도 생겨난다. 처음 자살을 시도했던 오베는 무려 나중에는 '자연사'를 하는 축복을 누린다. 상실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된다. 말미에 비치는 오베의 장례식장엔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파르바네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늘상 보여야 할 오베가 안 보인다. 파르바네는 남편 패트릭을 대동하고선 오베의 집을 방문한다. 그 집에서 숨을 거둔 오베를 발견한다. 곱게 적힌 유서를 읽은 뒤 오베의 삶 정리를 돕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관계망이 파탄난 우리 사회를 생각했다. 이웃 사람이 죽어도 수개월이 지나야 인지하는 시대다. 사실, 이런 장면 자체가 극적으로 전개되는 것 자체가 현실에선 요원하다. 오베라는 남자는 현대인의 단절된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자연사냐 자살이냐 그 극적인 순간을 가르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이웃'으로 대변되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관계망'이다. 







[나슬기의 오층섭탑]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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