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버린 삶들
「아부지 , 자 봐요. 언니가 왔어요. 언니가, 정말 열 두시가 되었으니까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아부지 자, 어때요? 됐지요? 아부지. 」
식모가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부지, 저렇게 언니가 왔어요. 그렇게도 기다리던 언니가 왔어요. 」
소리를 지르면서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열기띤 적의로 타오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면서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고는 허공에다 대고 허위적거리었고, 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 소리는 밤내 이어질 모양이었다.
이호철 닳아지는 살들
가족들은 자명종이 알람하는 자정을 기다린다. 귀가하리란 희망의 꼬투리도 주지 않는 맏딸을 기어코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은 가정 내 질서를 세웠다. 모두 응접실에 모여 소파에 붙어 앉아 자정 전까지의 시간을 축내는 것이 그것. 몸만 묶였다 뿐이지 실은 저마다의 몽상과 공상이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부지런한 시간이다.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 속의 가족들은 이렇듯 오지 않은 희망을 기다리며 집 안에 갇힌다. 아니 제 몸들을 가둔다. 맏딸을 기다리긴 기다리나 누구 하나 버선발 재촉해 대문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기력의 기력을 다해 기다리는 행위만 반복한다. 언젠간 오겠지. 사실 맏딸이 와도 몰라, 안 와도 몰라다. 시간과 공간을 공식적으로 허비할 명분이 필요한거다.
당신도 그럴걸. 나도 내 맏딸을 갖고 있다. 품어 낳아 기른 맏딸이 아니다. 기다림의 대상 말이다. 수줍게는 연인에서부터 당차게는 무어가 무어가 되겠다는 꿈, 담대하게는 내 나라가 이렇게 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기대를 기다리며 산다. 영희와 성식과 정애와 식모와 아버지 다섯이 모여 복닥거리는 응접실 대신, 침대와 책상만으로 배부른 내 방이나 익명이 남긴 책 향기가 고스란한 학교 도서관, 자주 들르는 신촌의 카페는 모두 내가 붙어 앉아 기다림을 기다리는 장소다.
내 문제도 위의 다섯과 일치한다. 기다리긴 하나, 운동화발 재촉해 기다림을 직접 구하러 다니지 않는다. 연애 문제도 그래, 군계 중 일학이 아니라면 근면한 태세로 연애하겠다! 해보겠다!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연준생(연애준비생..?)으로서의 포부가 옅다. 꿈도 그래, 그래 사실 이 방면에 있어서 나는 최선 (그런데 최선이란 뭘까요?)을 다하고 있지만, 그렇대도 서류를 씀과 필기를 통과함에 있어 매번 미진함을 느낀다. 나는 미적미적 미진미진하다. 이건 사실 내 발 굴려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찾아간다고 합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나는 여전히 이 일만은 도서관 변죽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 사실 여기서 움직여야 할 건 발이 아닌 팔이겠지. 열심히 쓰고 읽고.
그렇다면 담대하게 말한 "내 나라가 이렇게 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나는 브런치를 발행하는 금요일에서 금요일을 건너는 일주일 사이에 수많은 사회의 부정을 본다. 기껏 한다는 일이 브런치를 빌려 한 분 한 분 소중한 구독자님들께 사소한 불평만 질질 흘리는 일이다. 내 나라를 위해 나는 어떤 발짝을 떼야 할까. 어느 방향으로, 어떤 보폭으로, 어떤 문을 넘어 나가야 내가 꿈꾸는 지경을 마중할 수 있을까. 뉴스에 사사건건 관여하는 일, 소화시키기 어려운 질긴 문제들을 꼭꼭 씹어보기, 카레 속 고기 뒤지는 것처럼 원인 찾아내기. 참 말만 쉽고 행하기 어렵고 추상적인 것들의 나열이다. 나도 알고, 알지만 하기 어려운 것들...
닳아지는 살들의 주인공들은 저 너머의
꽝 당 꽝 당
소리에 기가 바싹 마른다. 무얼까? 무슨 소리일까? 그 소리는 주인공들의 심사를 범벅한다. 맏딸을 기다리는 응접실의 숙연을 비집는 꽝 당 꽝 당은 '이제 하찮은 기다림은 그만들 해'일까, '그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서 직접 찾으러 가' 일까.
나는 서울 메트로 비정규직이 마지막 경력이 되어버린 어린 김군의 뉴스를 보며, 섬마을 여교사의 성폭행 사건에 "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을 당당히 내보이는 비정과 무정을 들으며, 배임이 몸에 배인 큰 그룹들을 보며, 감자 싹 도려지듯 잘려나가는 해직자들을 보며,
'꽝 당 꽝 당'
쇠붙이 소리를 듣는다. 무얼까? 무슨 소리일까? 이 소리는 내 심사를 뒤엎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발이 매인 신세. 언제쯤 뭐가 잘못되었는지 들추고 다닐 자격이 생길까, 나는 오늘도 여전히 닳아지는 살을 달고 닳아지는 살들과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고는 허공에다 대고 허위적거리고 있다. 이건 자기 비하가 맞다. 갑자기 울적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