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주는 자유란 미명, 불안정이란 악명
걸어도 걸어도 목적 없는 시간만 끝없이 펼쳐지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을까? 갓난애도 스케줄이 있는 요 땅에. 그렇다면 당신은 타임 푸어(time poor)인가요?
우리나라 일인 연간 근로시간은 2092시간. 대충 한 주를 기준으로 나눠보면 68시간. 이 글이 발행되는 오늘 금요일을 기준으로 당신은 이번 주도 아마 68시간을 근로하며 근면했겠습니다. 아마 그 보다 조금 넘칠 수도, 조금 미달할 수도 있겠지요. 오류는 평균의 팔자니까요. 물론 밥 먹을 시간이야 있지요, 가족과 밥 먹을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화장실 갔다가 손 씻을 시간도 있어요, 내 아이 목욕시켜줄 시간이 부족할 뿐이지요. 거래처 연락받을 시간은 있어요, 부모님 안부 전화 드릴 시간이 없을 뿐이에요. 아, 이건 성의의 부족인 건가요?
이래 저래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우울한 국민에게, 정부가 항우울제를 처방하겠다고 했습니다. 밝힌지는 좀 됐지만 법석스럽게 회자가 되진 못했어요. 그래도 알 사람은 안다는 그것, 바로 <시간선택제>입니다.
목적은 아주 명료해요.
-일, 가정의 양립
-점진적 퇴직 및 재취업
-일, 학습 병행
-기업 활력 제고
절절한 도입 이유를 다 토막 쳐내고, 가장 주요한 부위만 말씀드릴게요. 고용노동부는 이렇게 밝히고 있어요. 사업주와의 협의를 통해 근로 시간, 근로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 요일 선택이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겁니다. 전일제 노동이 불가한 국민은 정부의 처방약인 시간선택제를 통해 자신의 스케줄에 맞는 일자리를 얻으면 되는 겁니다. 2013년 실시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수요조사에서 84%의 응답자가 "시간 선택제로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고 해요. 과반을 훌쩍 넘는 저 위대한 숫자에 정부의 등등한 기세가 느껴집니다. 조사의 질문이 긍정 일변도가 아니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워 저 숫자를 맹신할 순 없겠지만(예를 들면 이런 식인 거죠, Q. 규정된 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근무할 수 있는 시간선택제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따위의) 수요 이유에는 수긍이 가요.
이유도 아주 명료하죠.
-건강 상의 문제
-육아
-점진적 퇴직 희망
그래요. 시간선택제는 수요 존재, 일자리 다양성의 측면에서 도입이 긴요해 보이네요. 그런데 이렇게 와아아아 짞짝짝짝 손뼉 치고 넘기기엔 껌을 뱉지 않고 뱃속으로 넘긴 듯 개운하지가 않네요. 바로 위의 목적 부분에 적어뒀던 '기업 활력 제고' 탓인 듯합니다.
고용노동부는 시간선택제가 인건비 문제로 전일제 채용이 어려운 사업장에 인력 수급의 용이성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이 제도가 복리후생비 증가 등의 '문제'를 완화해준다고 선전합니다. 와, 사업주 입장에선 정부에게 손바닥 찢어져라 갈채를 부쳐야겠네요. 그러나 이를 근로자 입장에서 해석해 봅시다. 일단 전일제 직원과 시간선택제 직원은 업무 시간에 차이가 있으니 임금의 격차는 당연한 거겠지요. 다만, 여기에 빠진 조건이 있습니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의 상식이 그것입니다. 전일제 직원과 시간선택제 직원이 같은 업무를 한다면, 동일 수준의 시급을 지급해야 한다는 부문이 쏙 빠져 있습니다. 단순히 *전일제 근로자와 균등 대우.라는 항목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렇듯 각 없는 두루뭉술한 표현은 결국 아무 표현도 아닌 셈이지요. 사업주의 재량에 맡기겠단 거죠. 동일 임금을 규정하지 않음은 결국 임금 차이를 수수방관하겠단 뜻으로 비칩니다.
복리후생비 증가를 '문제'로 보고 있는 정부의 태도도 께름합니다. 사업주의 입장에선 제 돈 나가는데 속 쓰린 거야 마땅스럽다 싶긴 합니다. 다만 복리후생비 안 드는 시간선택제 직원을 채용하세요! 의 방식으로 제도를 광고하는 정부의 마음 씀씀이가 씁씁할 뿐입니다. 근로자의 복리후생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국가 또한 좋은 일자리를 위해 이를 법으로 보장해야 하구요. 이 비용의 증가를 문제시 하는 일이 내 새끼 분유값 아쉬워하는 일과 많이 다를까요? 결국 다 먹고 사는 일과 일맥인데 말이죠. 실제 매일경제 기사를 살펴보면, 시간선택제 일자리 근로자의 사회보험(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가입률은 30%대라고 합니다. 전체 근로자의 사회보험 가입률이 88% 임과 비정규직 사회보험 가입률 53~67%, 정규직의 사회보험 가입률이 95% 이상임을 감안할 때 시간선택제 일자리 근로자의 복리후생은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근로자더러 이런 험난한 형편을 조장하는 제도를 인생에 끌어들이라니, 참 주책입니다.
일자리가 생기기야 생기겠지요. 일자리 자체의 수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의 질입니다.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도 '나쁜 개혁'으로 비판받는 이유는 저질의 미니잡 (Mini Job)만을 찍어냈기 때문입니다. 복리후생이 튼튼한 시간선택제는 불가능한 걸까요? 정부와 사업주가 손 맞잡고 투합하는 현장에서 일-육아 양립이 불가하거나, 허리가 쑤시거나, 퇴직을 준비하고픈 근로자들은 윗목으로, 가장자리로, 결국 외부로 밀려납니다. 이는 결국 비정규직의 비상한 비대화를 조장할 것입니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 이외의 시간을 버려뒀던 이들이, 나도 좀 살아보자고 선택한 일자리에 이렇게 지끈한 배반이 기다리고 있어서야 될까요. 복리후생이 인정되지 않은 시간선택 근로자는 직업 유목민의 다른 말일 것입니다.
하우스푸어, 타임 푸어, 잡푸어, 푸어, 푸어, 푸어.
속상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