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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Jun 20. 2016

백 엔의 사랑(100 Yen Love, 2014)

백 엔의 삶 그리고 백 엔의 위로

 


 영화의 카메라는 '백 엔의 일상'을 비추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32살의 백수다. 여전히 부모님의 집에 얹혀산다. '치주염'을 치료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이치코는 답한다. "이미 여자이길 포기했어요." 그것은 삶을 포기했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치코의 얼굴에선 어떤 활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N포 세대요, 그런 포기를 달관한 달관 세대다.



 후미코(코이데 사오리)와 대판 싸우고 독립을 결심한 이치코가 처음 발 디디는 '편의점'이란 장소는 '백 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된 삶의 무대다. 편의점은 '백 엔의 생활'을 표방한다. 그것은 그곳이 '백 엔의 생활'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란 메타포다. 그곳엔 하루 18시간 일을 하다 우울증에 걸린 점장이 있다. 알바 생활을 하던 중 카운터에 손을 댔다 쫓겨난 할머니도 있다. 할머니는 해고된 뒤엔 편의점 뒷공간을 찾아와 날짜 지난 음식을 가져간다. 그것을 모아 다음날 아침 거리의 빈자와 소박한 파티를 벌인다. 이치코가 알바 생활 중 만나는 모든 인물은 '백 엔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삶은 이치코가 알바를 하는 심야 시간대와 비슷하게 우울하고 쓸쓸하다. 어쩌면 '백 엔의 주인공'들이기에 그 시간대를 자신들의 활동 시간대로 잡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다. 위로보단 모진 질타가 따른다.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보내는 이치코를 후미코는 못 마땅해 한다. 쏘아붙인다. 이치코를 바라보는 후미코의 시선은 '백 엔의 삶'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세상은 위로는커녕 백 엔 짜리 삶이라며 그 삶을 답답해 한다. 닦달한다. 심지어 '패자'라며 낙인 찍기도 한다. 조롱만 있을 뿐 어떤 따뜻한 위로도 '백 엔의 삶'엔 전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에 '백 엔의 위로'를 보내고자 한다. 이치코는 복싱에 끌린다. 달리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한 모습을 본다. 치열한 경쟁 뒤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복싱 시합 중 넉다운당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의 등을 상대 선수가 두드려준다. 카노를 끌어안고서 패배의 쓴맛을 달래준다. 이치코에겐 이 모습이 낯설면서도 아름답게 와닿는다. 누구보다 그녀에게 절실했던 건 따스한 위로요, 격려였다. 마음을 달래주는 작은 등 두들김이었다.  복싱의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매력에 빠진 이치코의 모습은 패자에게 아무런 위로를 전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동시에 그런 등 두들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이치코를 복싱에 빠지게 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사회에는 없는 '백 엔의 위로'다. 


 이치코는 복싱 시합에 나선다. 회심의 일격을 날리나 넉다운당하고 만다. 얼굴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런 그녀를 상대는 가슴 따뜻하게 안아준다. 등을 두드려준다. 인생이란 실전에는 전혀 없는 패자에 대한 위로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격려하는 그 장면은 더 없이 아름답게만 와닿는다. 영화는 '백 엔의 위로'를 전한다. 승패만 있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다. 위로는커녕 '패자'란 낙인만 찍는다. 영화가 전하는 그 위로의 한마디는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그리는 이상적인 경쟁의 장의 모습은 카노가 패배한 이치코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장면, 그 한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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