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말하려고 한 게 아닐까
내가 살아보지 못한 현장을 글로 두드리는 자의 신기神技. 강물의 물 삽이 파낸 이북의 두만강이 소설가의 일필에 숨을 깨우치고 이 곳 멀리까지 흘러와줄 것 같은 그 신기. 오늘 최인훈의 두만강을 보고.
1930년대의 그 구식의 강은 발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지리와 이념의 제약을 여태껏 걸어두지만, 최인훈의 안내는 내 신식의 눈이 두만강을 바라보게 한다. 두만강 곁에 사는 소설의 주인공 경선은 말한다. 사회의 추상적인 암영을 관념하고 싶지만, 기껏 사소한 일상의 걸림돌 고르기에만 번뇌하는 자신이 싫다고. 경선의 발에 채이는 그 걸림돌은 바로 사모의 대상인 성철이다. 도심서 공부하는 성철은 간혹 들르는 고향 두만강에서 경선과 만나지만, 매번의 만남은 서먹하니 진척이 없다. 그렇다고 성철이 경선을 멀찌감치 두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성철도 경선을 내심에 귀히 담아뒀으나 너무 귀해 어찌 그녀에게 다가가야 할지 요령부득일 뿐이다.
근대사가 기록하는 30년대를 떠올려본다. 항일 무장 투쟁의 열과 성이 다해지던 시기, 일본의 말살 통치가 국토를 유린하던 시기. 1930년대를 장악한 정서는 절망과 굶주림, 독립에의 열망일 것이다. 최인훈은 이들을 댕강 잘라낸다. 절망의 묘사 대신 신정과 구정을 쇠는 일본인과 조선인 저마다의 축제를 그린다. 굶주림 대신 중상층의 저녁 성찬을 말한다. 암약으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 대신 일제 치하에 몸을 맞추며 살아가는 조선인을 등장시킨다. 소설은 연애 감정과 두만강변 H읍의 소사에 집중한다. 경선과 성철의 서행하는 애정 관계, H읍에서 두루두루 살고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미미한 적개심, 강점당한 국토에서 여전히 맞이하는 신정과 구정의 축제, 맺어지는 혼인에 대해 소상히 전달한다. 그러나 「두만강」은 꽈광하고 터지고 쿠궁하고 부서지고 따다다다 총알 튀는 굉음 없이도 전쟁소설이 된다. 소설엔 항일 투쟁의 모습이 빠졌지만 그만한 비애가 담겼다. 항일 할 필요와 소용을 느끼는 중추기관이 마비되어 버린 비련이 등장한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대로 기뻐하고 조선 사람들은 조선 사람대로 흥겨워한다. 아래위 깍듯이 일본 예복을 차리고 새해 인사하러 다니는 일본 사람과 아래위 희게 차린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가열한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 같지 않은 풍경이다.
일본 사람이 이렇듯 모든 자리에서 자기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H읍 사람들에겐 조금도 이상하거나 하물며 불쾌해할 일이 아니었다. 구리모도가 군수를 하지 않고 누가 군수를 하겠으며, 유다끼가 식산은행 지점장을 하지 않고 누가 하겠으며, 사람좋은 노나까를 빼놓고 누가 A소학교 교장을 할 것이냐. 그것은 눈 위에 눈썹이 있는 것처럼 아무 사람에게나 분명한 이치였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H읍 사람들의 시국에 대한 피동적인 태도는 결코 이방 민족에 대한 의식적 불만의 표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것은 무서운 게으름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은 우리 운명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오랜 세월 눌리면서 체념한 사람들의 무기력의 표현이다.
주인 손에 길이 든 애완견이야 맞았다고 깨갱하지 내내 투견으로 부려진 개는 맞아도 잘못된 줄을 모른다. 일제 강점 20년을 겪으며 몰주권에 내성이 생겨버린 H읍의 사람들은 저희들 땅을 활개 하는 일본인들을 부정하긴 커녕 오히려 '사람 좋다'며 추켜주고 있다. 두만강의 등장인물들은 일제의 치하에서 일제와 반목하고 저항하는 용사의 열의 대신 내 부엌과 내 안방의 소사를 시름하는 일에 겨우 열량을 다할 뿐이었다. 그게 누구의 잘못일까. 처마가 떨어지고 대들보가 주저앉은 나라 속에서 살다가 민족의 자존마저 누그러진 백성의 종내인 것을.
꾸준함은 이래서 무섭다. 꾸준한 열패와 꾸준한 피해는 민중으로부터 애국할 의지, 선명한 민족성, 잘못 꾸려지는 나라 살림에의 각성과 비리에의 분노를 옅게 만든다. 잘못한 대상을 찌를 성난 각은 오랜 핍박과 교묘한 조종에 의해 둥글려진다. 잘못은 잘못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지당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한 때 각졌던 뿔의 증거로만 남은 무뎌진 모서리를 갖고 누구도 찌르지 못하고 무디게 살아간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무서운 걸 무섭다고 느끼지 못하는 무서움 말이다.
두만강은 현재를 비춘다. 나는 책을 읽는 동시에 신문 칼럼을 읽었다. 아니, 두만강이 오늘자 칼럼보다 현실과 접착돼 있다. 지금과 뭐가 다른가. 고위공직자가 어떤 배임으로 언론에 제 이름을 떨치건 맛집에만 몰두하게 된 지금 말이다. 맛집이 그만큼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고통을 통각하는 신경이 말라서다. 신경을 누가 마르게 하는데. 두만강에선 일제가, 무능한 국가가 그랬고 지금 우리 곁의 한강漢江에선 누가, 또 무능한 누군가가 그러고 있다. 일상적 감정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두만강은 일상적 감정에 가려진 현실의 암영에 조금 더 예민하자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역사는 돌고, 소설은 글을 휘둘러 현실을 두드린다. 두들긴다. 쾅쾅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