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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r 19. 2016

헝거(Hunger) 2008

단식하면서까지 그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

 


야위어도 너무 야위었다.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단식한 결과 그의 몸은 깡말라 간다. 안에서부터 몸은 파괴된다. 심장은 기능을 않는다. 신장, 췌장 등 소화 기관도 거친 숨소리를 낸다. 밥 달라는 신호다. '꼬르륵' 이상의 요동이 그의 몸을 뒤흔든다. 그런데도 보비 샌즈는 끝내 밥먹기를 거부한다. 



 신념. 보비 샌즈에겐 확고한 신념이 있다. 단순한 형사 사범이 아니란 신념이 그렇다. 그는 IRA 조직원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옥됐다. 이유 없이 깡그리 부수는 단순 흉악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치적 신념이 확실한 '정치범'이다. 신념을 말살하는 영국 정부에 맞서 보비 샌즈는 '단식'으로 대응한다.  깡말라가는 보비  샌즈의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투철한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죽어가는 눈동자이지만서도 신념의 빛만큼은 그 위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레이몬드 로한(스튜어트 그레이엄)이  보비 샌즈를 강제로 샤워시키는 행위는 신념을 지워 버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교도관들은 폭력적으로 보비 샌즈의 몸을 닦는다. 지워지는 건 때가 아닌 지워져선 안 될 '신념'이다. 샤워 거부는 보비 샌즈가 교도관들에게 신념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강압적으로 몸을 씻김과 동시에 교도관들은 보비 샌즈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깔끔한 옥방에 갇힌 보비 샌즈가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다. 영국 정부는 그들의 신념에 '미소'로 응답했다. 신념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똥칠한 감옥 벽이 깔끔한 옥방으로 변한 순간 보비 샌즈가 마주하는 건 짓밟힌 신념이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있을까? 내 생각이 곧 신부의 생각이기도 하다. 보비 샌즈와 대면한 신부가 말한다.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양심상 그런 행동을 응원할 수 없다." 사니까 사는 거다. 사바나 초원의 저 사자조차 생존 본능을 저버리지 않는다. 신념을 위해 생존을 포기하는 행위는 본능에 어긋난다. 윤리적으로도 납득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굳이 '신부'가 등장한 이유다. '신부'는 윤리의 정점에 위치한 존재다.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는 보비 샌즈의 결정이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임을 강조한다. 그의 결정은 자신만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겐 분명 민폐를 끼치는 일이다. 영화는 거듭 부모와 와이프의 모습을 비친다. 그의 결정을 응원하면서도 응원하기 싫은 그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안타깝다. 


 그러니 인간인지도 모른다. 본능만 있다면 신념을 고수하지 못한다. 중요한 순간에, 그러니까 위가 배꼽시계를 울릴 무렵 먹거리를 먹고 단식을 중단할 테다. 인간에겐 '본능'을 넘어 추구하는 무언가가 있다. 보비 샌즈는 말한다. "제겐 신념이 있고, 그것이 가장 센 무기다." 때론 신념은 본능에 앞선다.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저버릴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인간이다. 비윤리적이다 아니다 뭐라 할 문제가 아니다. 신념을 쥘 수밖에 없는 보비 샌즈의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보비 샌즈는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보비 샌즈의 말마따나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다. 



 '정치범' 지위가 박탈당한 보비 샌즈의 모습을 보자. 단순 '형사사범'에겐 한치의 관용도 주어지지 않는다. 교도관들은 갖은 폭력을 보비 샌즈에게 가한다. 레이몬드 로한은 보비 샌즈를 가격하다 손에 상처가 났다. 보비 샌즈는 전투경찰들에 둘러싸여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단식하지 않았다면 보비 샌즈는 그렇게 폭력을 당하며 살았을 테다. 신념을 좇지 않고선 그는 '크로스 컨트리'로 돌아갈 수 없다. 보비 샌즈는 죽음 대신 신념을 택한 게 아닌 신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던 거다. 






[나슬기의 오층석탑]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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