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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r 19. 2016

해피투게더 春光乍洩 1997

닻 없는 배를 사랑한 모항


 못하는 술을 온몸에 얼근히 걸치고 들어온 날엔 냉수만큼이나 강렬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취기는 내 발목에 추를 매단 것 처럼 우울의 기저로 나를 끄는데, 딱 그 때 생각나는 영화다. 왕가위와 크리스토퍼 도일이 창조해내는 매스껍도록 뒤섞이는 영화의 분위기에 추가 안착한다. 나는 발 뒤꿈치를 위태롭게 세우고 방으로 들어와, 온 전등을 다 끄고 오로지 노트북 불빛만을 살려둔다. 다음 순서는 해피투게더 재생하기. 양조위 장국영 주연, 왕가위 감독의 1997년 작품이다. 다른 이름은 춘광사설. 배경은 아르헨티나다.



 언제나 아쉬운 쪽은 보영(장국영)보단 아휘(양조위)였다. 이별도 재회도 시작은 언제나 보영으로부터였다. 아휘는 납득 안 되는 수긍만을 강요당했을 뿐이다. 영화는 또다시 찾아온 재회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보영의 "다시 시작하자"라는 일방적 통고로써. 그렇게 그들은 해진 옛 관계를 새롭게 깁기 위해 홍콩을 떠나, 지구 대척점의 아르헨티나로 향한다. '이번엔 다를 거야'란 안개 속으로 차를 몬다.



 침상 맡에 놓인 이과수 폭포 전등에 매료되어, 그곳에 가보기로 한 둘은 여정 내내 사소한 다툼을 계속한다. 차와 지도 모두가 말썽인 폭포로 가는 길, 그 위에서 그들은 서로가 다름을 여실히 느낀다. "지도가 있는데도 길을 잃어?"/ "길 좀 잃으면 어때!" 따위의 극단의 가치가 오간다. 가까스로 닫혀가던 상처를 두 손가락으로 활짝 열어젖힌 셈이었다. 그들은 잊고 있던 상처를 통감했고, 그 길로 다시 헤어짐을 결정한다. 연고 없는 아르헨티나에서 서로가 없는 삶을 각오하게 된 것이다.


 

탱고 바에서 일하게 된 아휘


재회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야!"라는 뚱딴지같은 말이 이들에겐 해당된다. 이들에게 이별이란 재회의 다른 말이니까. 아휘가 일하는 탱고바에 보영이 들른 날을 기점으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역시나 시작은 보영. 보영의 아픈 손은 재회의 좋은 빌미가 된다. 아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 집엔 작동이 정지된 두 손을 한 보영이 있었다. 아휘는 밥을 볶고, 계란을 익히고, 씻지 못하는 보영을 위해 땟국을 수차례 짜내가며 전신을 닦아준다. 그렇게 다친 보영은 아휘의 손 안에 살았다. 아휘는 팔 뻗으면 손 끝에 와닿는 보영의 존재에 안심한다. 퀴퀴한 침구에 살림 튼 벼룩이 생살을 쥐뜯어도, 밤새 투닥거려도, 함께여서 마냥 좋았을 것이다. 이 무사 안위는 보영 손의 회복과 같은 속도로 구겨지고 부서진다. 



 아휘는 '오히려 보영의 손이 아팠던 때가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이 덤덤한 고백은 긴 울림의 터널을 만들었다. 아휘는 늘 애끓었고, 보영은 늘 애끓였다. 아휘의 입장에선 자신이 인력으로 보영을 잡아당긴다면, 보영은 척력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듯 느꼈을 것이다. 공존이 불가한 이 역학관계는 '보영의 아픈 손'으로 인해 임시 해제된다. 둘 사이에 오로지 아휘의 인력만 작용했던 시간, 아휘는 그 시간만을 평생 바랐는지도 모른다. 



 보영은 자신의 손이 낫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아휘의 손 밖으로 나섰다. 아휘는 밤늦게 들어오는 보영에게 다그친다. 보영의 "담배 사러 나갔다"는 싱거운 답변을 변명으로 들은 아휘는, 곧장 집 밖에 나가 담배를 자루 채 사온다. 아휘는 부지런히 태워도 1년은 거뜬할 담배갑들을 집 안 찬장에 쌓는다. 보영을 집 밖에 내놓을 수 없다는 타는 집념의 발로다. 보영에게 찾아온 두 손의 자유가 아휘에겐 두 손의 결박으로 돌아간다. 아휘는 보영이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날까 두렵다. 그리고 영영 자신을 떠나버릴까 두렵다. 그의 이런 집착은 끝내 보영의 여권을 숨기기에 다다른다. 자신을 가두려는 아휘에 보영은 화가 난다. 가두면 탈출하고 싶은 법, 그렇게 보영은 다시 아휘의 손 안을 벗어난다. 


보영의 떠나는 발소리를 듣는 아휘


 왕가위 영화에서 계단은 기대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양조위는 함께, 혹은 각자 계단을 오르내리며 서로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아비정전에서 수리첸(장만옥)은 아비(장국영)의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긴장한다. 장학우는 계단 맡에서 농염한 춤을 추는 루루(유가령)를 보며 상사의 마음을 키운다. 해피투게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휘는 목재 계단이 높고 긴 건물에 산다. 상대를 향해 계단을 오르내리며 발생하는 공간의 이동, 이와 동시에 심리의 기폭이 발동한다. 보영은 아휘의 집에 갑자기 찾아올 적에도, 화가 나 문을 힘주어 닫고 떠나갈 때에도, 허술한 목재 바닥에 발자국을 꽝꽝 눌러 찍었다. 아휘는 멀어지는 보영의 걸음걸음에 심장이 밟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스러지는 기대. 그렇게 바닥재가 전송하는 타인의 원근은 주인공의 눈물을 청각 화한다. 하릴없이 귓가에서 놓이는 보영 발소리, 아휘는 그 소리가 얼마나 잡고 싶었을까.  



 나는 이렇듯 이 영화가 내는 모든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보영과 아휘는 대화를 할 적에도 보통의 연인들과 다르다. 귀를 달게 하는 나긋나긋한 대화란 없다. 단지 고성이 오갈 뿐이다. 서로를 추궁하고 의심하며, 꺼질 것을 명하고 떠날 것을 고한다. 주황색 물감을 엎지른 듯한 아휘의 작은 집에서 치고받는 윽박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한 방식이었나. 고성 끝엔 지극한 간호가, 탱고 춤이, 키스가 있었다. 그 윽박은 서로가 멀어진 자리에 남은 침묵으로써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 이별의 꼬리를 재회의 머리가 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소리는 바로 탱고다. 탱고는 러닝타임을 지배한다. 탱고의 예고 없는 변주나 질척이는 선율은 아휘와 보영의 위태한 관계를 대변한다. 끊어낼 수 없는 그들의 억센 인연의 줄기를 음악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영화를 보는 중에 탱고 음악만 나오면 괜히 온몸이 쭈뼛 서곤 했으니까. 불안했다. [fragile!] 표시가 붙은 종이박스를 "집어던져!"라고 종용당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깨질 것을 알고도 계속 봐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공포였다. 그 뒤를 따를 주인공들의 슬픔이 미리부터 힘들었다. 어쩌면 내게 이 영화가 내는 소리는 모두 호곡이었다. 모든 것이 슬피 우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아휘가 항상 바라보던 '투게더'의 그림, 뒤늦게 알아챈 보영



 보영이 집을 떠나간 후,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집 안 테이블에 남기고 홍콩으로 돌아가버린다. 다시 찾은 아휘의 집에서, 보영은 이과수 폭포 후면의 그림을 발견한다. 아휘가 오죽잖게 쳐다보던 전등은, 이과수 폭포 그 자체가 아닌 단지 '투게더'의 모습이었다. 둘이 되고 싶던 하나의 아휘, 너무 늦게 알아챈 나머지 하나의 보영. 보영은 이내 무너진다. 변태한 성충의 허물처럼 남아있는 아휘의 담요를 부둥켜안고, 보영은 운다. 울고 울고 운다. 회한이겠지, 자책이겠지. 혹은 자신의 인력을 끝까지 척력이라 오해하고 떠난 아휘에 대한 유감이려나.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사무친다. 몇 번을 봐도 직전엔 긴장을 달래는 심호흡이 필요하다. 나는 장국영의 슬픈 얼굴이 힘겹다.)



 아르헨티나는 영원히 그들에게 더럽고 낯선 이역일 것이다. 애초부터 '새로움'이 목적이었기에 살갑기 어려웠던 그곳 아르헨티나. 좌우로 나눠 꽂은 사소한 링 귀걸이 한 짝과 고독만이 그 둘이 나눈 공통은 아니었을까. 외출이 감금이고 미는 게 당기는 거고 증오가 사랑이고 상처가 쾌유이고 함구가 질문이고 윽박이 침묵이고 별리도 유착일 것이다. 언제? 함께 일 때 말이다.


 


노래 Happy Together가 영화의 종막을 알린다. 


Imagine me and you,

I do

I think about you day and night

It's only right

to think about the girl you love

and hold her tight

so happy together


hold him tight이 힘들어 happy together가 될 수 없었나. 애초에 닻 없는 배를 사랑한 모항을 탓하며, 끝내 미완일 수밖에 없는 해피와 투게더를 기린다. 아프게 사랑하는 영화.







[견해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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