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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Oct 31.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 5

조선은 어떻게 망했는가 - 왕비 암살에 가담한 낙오자들

왕비 암살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 정치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1) 명성황후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대원군의 수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1895년 7월 암살 미수 사건), 2)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왕비를 견제하고자 했던 일본의 조력, 3) 구원(舊怨)을 해소하려고 했던 개화파들의 가담이었다.


1)은 왕비 암살을 반역이 아니라 '궁중 쿠데타' 내지는 "왕의 눈을 어지럽히는 왕후에 대한 처단"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대원군은 1895년 초부터 사실상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별장에 감금되어 있다 시피 했다. 서손 이준용이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기획하다 실패하고 강화도에 유배된 이후의 일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사대문 밖'에 있는 별장에 대원군을 가둬 두고 정치적 손발을 완전히 잘라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은 가택연금을 또다른 정치적 기회로 이용했다. 공덕리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던 용산(龍山)과 가까이에 있었다. 親 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이 드나들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을 만한 조건이었다. 만약 대원군이 대궐 근처의 안국동 운현궁에 계속 살았더라면 왕비 암살 같은 것을 준비하기도 전에 비밀이 새나갔을지도 모른다. 1895년 8월에는 서손 이준용이 풀려 나와 할아버지의 별장에 같이 거주하면서 외부 소식을 실어 날랐고, 고종의 형인 이재면도 머무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유길준 등의 개화파는 공덕리 별장을 궁중 쿠데타의 플랫폼으로 고려했다. '아소당'(我笑堂)이라고도 불리는 이 집은 아흔 아홉칸 짜리 저택이었다고 한다. 별장 뒤에는 대원군이 별세한 후 안장할 수 있도록 묏자리를 봐둔 상태였다. 


대원군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인 공덕리의 아소당. 아흔아홉칸 짜리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1895년 9월 조선 주재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를 귀임시켰다. 그는 어디까지나 '디테일리스트'였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일본의 국제 안보에 방해 되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상태를 뒤엎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김옥균 등의 조선 개화파가 섣불리 정변을 일으켰다가 무참하게 실패한 기억도 이노우에의 신중함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역할은 청일전쟁(1895.8까지) 동안 외상 무츠 무네미츠와 함께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돕는 것이었다. 김홍집 내각의 출범과 군국기무처를 통한 친일(親日) 정책의 도모 등도 이노우에가 거둔 성과였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이익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삼국 간섭이 일어나는 등의 해프닝이 생겼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발을 빼는 것이 현명했다. 게다가 이노우에는 대장대신(재무대신), 농상무대신, 총리 임시대리와 같은 요직을 지낸 바 있는 중진급 정치인이었다. 조선 공사직에 연연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청일전쟁기 동안 조선 공사를 지냈던 이노우에 카오루. 일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원훈으로도 손꼽힌다.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조선 공사가 된 인물은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였다. 그도 나름 육군 중장을 지냈고, 자작 작위를 받은 적 있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 유신을 지도한 핵심 인사들과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에게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설파하다 눈 밖에 난 사람이었다(조선 왕비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 일본에서는 자유주의자로 분류된 현실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당시 귀족 학교이며 황족들도 다니던 학습원(學習院, 오늘날에는 가쿠슈인 대학으로 유지되고 있다) 원장 등 비교적 한직을 돌고 있었다. 이토록 정치적으로 찬밥을 먹던 '낙오자'가 조선 땅에 부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무리를 해서라도 전임자들이 내지 못했던 결과물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겉으로는 '입헌 군주제'를 외쳤지만 사실은 천황 주변의 관료들이 강하게 사회를 통제하는 모델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헌법 제정'이나 '의회 강화' 따위를 외치는 인물은 가히 몽상가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미우라는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틀어 박혀 일체 대외활동을 삼간 채 보좌역 오카모토 류노스케, 1등 서기관 스기우라 후카시 등과 비밀 작업에 들어 갔다. 왕비 암살을 준비하던 유길준, 대원군 등과 '도킹'하는 일이었다.


을미사변의 일본측 기획자 미우라 고로. 

미우라 등이 대원군 측과 협의한 '거사' 날짜는 10월 10일 경이었다. 신식 군대인 훈련대 1대대(대장 : 이주황)와 2대대(대장 : 우범선)가 대궐을 포위하고, 약 60여 명으로 구성된 일본 낭인들과 조선 개화파 인사들이 쳐들어 가 "일을 친다"는 구상이었다(미우라 고로가 직접 쓴 '입궐 방략서'). 훗날 천도교 중진을 지낸 권동진은 동아일보 인터뷰(1930.01.27)에서 "애초 구상은 개혁을 반대하는 민후(閔后)를 폐비(廢妃)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정변을 일으킨 후 바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는 뜻이다. 조선 역사에서는 이미 왕후 윤씨(연산군의 생모), 인목대비(선조의 계비이자 광해군의 계모), 인현왕후(숙종의 정비), 장희빈(숙종의 후실) 등의 왕실 안주인들이 폐비를 당한 역사가 있었다. 임금의 아버지이자 한때 섭정이었던 인물이 나서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 구상이 갑자기 '여우 사냥'(미우라 고로가 붙인 왕비 암살 작전명)으로 번진 것일까. 조선 개화파들 뿐 아니라 미우라의 입장에서도 자칫하면 경력이 완전히 끝장날 만한 일까지 가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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