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스 Dec 14. 2020

넌 나한테 목욕감을 줬어

아르바이트 일대기 (1)

넌 

    며칠 전 브런치 글을 읽는데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있더라. 그 글을 흥미진진하게 읽다 보니 문득 내가 20대 때 했던 알바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이 글을 써본다.      


    나는 집안 사정상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용돈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한 달에 딱 20만 원이었다. 2000년도 초반에 20만 원이면 괜찮지 않냐고? 그 안에 차비, 교재비, 데이트비, 통신비, 밥값까지 포함인데? 그러다 보니 난 거의 살아있는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었다. (한강 하류에서 손 호호 불며 빨래에 방망이질하고 있는 사람 본 적 있다? 그게 나다 나!!)


   예상치 않는 지출이 있을 때는 ‘은전 한 닢’을 내듯 손을 벌벌 떨었으며... 술 먹다가 대중교통 끊기면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신촌에서 정릉까지) 특히 여자 친구 생일이 있는 달에는 선물 마련하려고 식수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웠다. 간이 심심한 날에는 라면수프를 타 먹기도 했다. (이건 농담...)      


    더 놀라운 건 뭔지 아나? 2학년 때부터는 등록금도 내가 내야 했다. 믿을 수 있나? 21살이 무슨 재주로... 하지만 엄마 아빠는 돈 한 푼도 줄 생각 없으셨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다들 네 나이에 독립하는데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고 귀에 못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면 거기서 날 낳지 그러셨어요!’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등록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3가지였다. 하나는 공부를 엄청 잘해서 장학금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정형편이 안 좋아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가정형편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면 마지막 방법이 뭐냐? 그건 다들 예상했겠지만 알바로 용돈과 등록금을 버는 거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알바였다!!’      


    대학교 4년 내내 과외를 엄청 많이 했으며 고기집 알바, 번역 자막 알바, 비영리단체 알바, 맥주집 알바, 제약회사 피실험자 테스트.. 등등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런 거는 남들 다 하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고 그동안 내가 했던 이색적인 알바에 대해서 한번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1) 엑스트라 알바 2) 모교 서빙 알바 3) 토론토 라쿤 알바 이렇게 3편 써보겠다.      






1) 엑스트라 알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유럽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 거 있잖아~ 2주 동안 10여 개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를 찍는 거... 기차에서 책 읽고 있으면 ‘줄리 델피’ 같은 여자가 와서 윙크하며 말 걸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 수중에 남은 건 텅 빈 통장뿐... 어쩔 수 없이 고수익 알바를 찾던 중, ‘엑스트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의도에 있는 빌딩에 가서 보조출연자 협회에 등록한 후 그다음 날 나는 드라마에 전격 데뷔했다. 그것도 그 당시 최고의 인기였던 <왕건>이라는 드라마에...     


    새벽 KBS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문경으로 갔다. 맨날 3~4시에 자다가 5시에 일어나려니 죽을 노릇이더라.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버스 뒷자리에서 친구랑 머리 맞대고 곤히 자고 있는데 ‘반장’이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꽥~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 안 일어나?”

   그제야 우리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이미 다른 엑스트라들은 나간 지 오래였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반장은 우리에게 빨리 나가서 옷 갈아입으라 했다. 밖에 나오니까 다들 신라병사, 백제병사 옷을 입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이 낀 상태에 초가와 성벽이 눈앞에 있으니 시간 여행을 온 것만 같아 신기했다. 반장이 지시한 대로 의상차 아래 노란 파렛트에 가보니 투구랑 상하의, 갑옷, 양말 등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제일 늦게 가서 그런지 남은 건 다 곰팡이에 슬어 변색되어있었다. 전날 비 맞아서 그런지 엄청 눅눅하고 비린내가 장난 아니었다.





    “이걸 입으라고요?”

    “싫어? 그럼 집에 갈래?”

    여기까지 왔는데 돈 한 푼 못 받고 집에 갈 순 없었다. 줄리 델피랑 레코드 가게에 나란히 음악 들으며 곁눈질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친구랑 나는 코를 막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발가락이 썩는 느낌이었다. 구역질을 참아가며 갑옷까지 입었는데(심지어 그때 나는 결벽증이 있었다) 문제는 군화였다. 파렛트를 보니 남아있는 건 왼쪽 군화 두 쪽이더라. 이건 아니다 싶어 반장에게 다가갔다.      

    “남은 게 이거뿐인데요?”

    “근데... 뭐 어쩌라고? 그럼 집에 갈래?”

    그는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오줌이 지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오른발에 왼쪽 군화를 우겨 신었다. 엄청 불편했다. 걸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펭귄처럼 뒤뚱뒤뚱거렸다. 절뚝거리면서 촬영장에 걸어가는데 다들 나를 안타깝게 보더라.

   ‘저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다들 생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느낌이었다. 새벽이슬 때문인가? 눈가가 촉촉해졌다.      


    현장에 도착했는데 제길, 첫씬이 하필 ‘돌격 씬’이었다. 돌격 씬이 뭐냐고? 그건 장군이 칼을 들고 ‘나를 따르라!’ 외치면 기마병과 우리 같은 몇 백 명의 졸개 보병들이 그를 따라 적군을 향해 빨리 달려가는 씬이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긴장되었다.

   촬영 장비가 세팅되고 TV에서만 보던 배우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연출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더니 모니터 앞에 장수처럼 털썩 앉았다. 멋있더라~

   나도 저렇게 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가 ‘큐’를 외쳤다.      


내가 연출한 정도전 전투씬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장군이 포효했다. 십 수 명의 연기자가 먼저 말을 타고 움직였고 나도 선배 엑스트라를 따라 열심히 뛰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연출자가 ‘컷’을 외쳤다.

    “야! 저 새끼 뭐야? 왜 저렇게 뛰어?”

   보니까 그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시에 현장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뒤늦게 반장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똑바로 안 하냐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신발이...”

    “집에 가고 싶어?”  그는 다시 눈을 부라렸다.

    오른발이 욱신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슛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뛰리라 마음 먹었다.


    ‘큐!’ 연출자는 외쳤고 나는 장군의 호령을 듣고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컷~ 컷!! 저 새끼 진짜 뭐야. 왜 걸음이 저따구야?”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선배 엑스트라들이 눈치를 엄청 줬다. 그럼 어쩌라고~ 깽깽이라도 뛸까?


     반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나보고 빠지라며 고래고래 욕을 했다. 나는 다리를 절면서 밖으로 나갔다. 친구는 그런 나를 애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타이타닉’에서 잭을 바라보는 로즈의 마지막 시선이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밤이 찾아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게 실감이 나더라. 뼈가 굽어졌는지 인대가 끊어졌는지 오 른발은 왼쪽 신발에 차츰 적응했다. 신발 두쪽이 같은 방향이라 아쉬웠다~  만약 투구가 작았으면 덕분에 머리가 작아졌을 텐데..


   엑스트라는 기다림이 반이었다. 갑옷을 입고 하루 종일 땡볕 아래서 대기하다가 반장이 부르면 현장에 가서 창이랑 칼 들고 몇 시간이고 서있었다. 연출 보며 '소새끼 돼지새끼' 등 각종 동물의 자식들~ 수 천 번 정도 잉태하다보니 촬영이 끝나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초가 담벼락 옆에서 누워서 자고 있는데 새벽 3시 정도였나! 반장이 우리를 깨웠다. 반쯤 떨어진 수염을 손끝으로 누르고 현장에 가니까 카메라 한 대만 저 멀리 있을 뿐 배우도 연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엑스트라 100명 정도 운집해 있을 뿐이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하품만 연신 내뱉고 있을 때 반장이 다가왔다.     


   “자! 다들 집중해~ 이제 불화살이 올 거야~ 그러니 알아서 피해? 안 다치게~”


    저게 무슨 말이지? 불화살? 잠결에 헛소리라도 들은 줄 알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저쪽 성벽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이더니 수백 개의 불화살이 검파란 하늘을 수놓았다. 밤하늘이 맑아서 그런지 청명하게 잘 보였다.

    ‘이야~ 장관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걸 여기 아니면 어디서 봐? 북유럽에서 오로라 보는 느낌이랄까? 암튼 그랬다. 근데 이상하게 그 불꽃이 점점 커졌다.

    '이상하다. 원래 이런 거야?' 싶을 때 다시 보니 불화살이 나한테 다가오는 게 아닌가!



 “피해!!” 그때 반장이 외쳤다.      


    실화였다. 정말 그랬다. 살고 싶어서 피했다. 땅에 불화살이 팍팍 박혔다. 나는 요리조리 움직이며 불화살을 피했다. 친구는 불화살에 맞아서 이미 쓰러져 있었다.

   ‘제기랄~ 이게 뭐야...’

   엄마 아빠가 생각났고 비엔나 역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그녀, 줄리 델피도 떠올랐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다음 생에서 만나요~  


    나중에 알고 보니 불화살은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화살촉은 헝겊으로 뭉뚝하게 만들었고 그 위에 마그네슘을 발라 손을 갖다 대도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불을 보면 나도 모르게 탭댄스를 추게 된다.




    연출자는 생생하게 잘 나왔다며 “오케이” 외쳤고 출연자 반장은 우리에게 박수를 쳐줬다. 박수고 나발이고 연출 가슴팍에 불화살을 쏘고 싶었다.

    “너도 한번 맞아봐라.”     


    그때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를 갈았고 (농담) 대학 졸업 후 KBS 드라마국에 입사했고 그 독사 같던 연출자의 후배가 되었다. 그리고 엑스트라 하는 한 달 내내 부단히도 나를 괴롭혔던 반장을 드디어 만났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당신은 나에게 목욕감을 줬어요. 어떻게 그 냄새나고 꼬질꼬질한 옷을 줄 수 있죠?”     


   그렇게 장난스레 이야기하니까 반장님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하더라.  



<엑스트라 에피소드 2편>

https://brunch.co.kr/@williams8201/3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